조선의 문화재2013. 12. 4. 00:46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畵風)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산천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진경시대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를 이루어 낸 시기로, 정선이 활동한 영조대는 진경시대 중 최고의 전성기였다.

 

진경산수화의 중심, 겸재 정선.

정선의 본관은 광주(光州)로, 선대는 경기도 광주(廣州) 일대에서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삶)하다가 고조부 연(演) 때부터 도성의 서쪽, 즉 인왕산 기슭에 터전을 잡았다. 정선은 1676년 아버지 시익(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악산 서남쪽 기슭 인근이었다. 19세기 유본예(柳本藝)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유란동은 북악산 밑에 있다. 언덕 바위에 〈유란동〉이라는 석 자를 새겼다. 이 동네는 청송 성수침(成守琛)이 살던 곳으로 꽃구경을 하기 좋은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선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와 같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은 그의 근거지가 바로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金弘道, 1745~?)나 신윤복(申潤福, 1758~?)이 화원 출신이었던 반면에, 정선은 가난한 양반 가문의 막내였다. 그는 열 살을 지날 무렵부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일하러 가는 형편이었으나,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만은 잊지 않았다.

 

정선은 유란동에 살면서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이들에게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안동 김문의 인사들은 그를 후원했고,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金門)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다. 현재에도 청풍계가 위치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청운초등학교 건너편 어느 주택 안 담벼락에 남아있는 이 글씨에서 청풍계의 옛 자취를 느껴볼 수가 있다. 정선은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英祖, 1694~1776)의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정선보다 18년 연하였지만,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정선과 6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다. 정선은 40대 이후에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1721년(경종 1) 46세 때 경상도 하양(河陽)의 현감을 맡아서, 5년간 근무한 후 1726년(영조 2) 임기를 마쳤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성주 관아의 정자를 그린 <쌍도정도(雙島亭圖)>가 전한다. 1727년 정선은 북악산 서쪽의 유란동 집을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인왕산 동쪽 기슭인 인왕곡(仁旺谷)으로 이사를 했다. 정선은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의 대표작인 <인곡유거(仁谷幽居)>는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그린 그림이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 이것은 영조대에 정선이 여러 관직을 지낸 것에서도 나타난다. 1729년 정선은 영조의 부름을 받아 한성부 주부가 되고, 1733년 6월에는 청하현감에 임명되었다. 청하현감 시절 그림으로는 <청하성음도>, <내연산삼용추(內延山三龍湫)> 등이 있다.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 낭청(郎廳)을 지냈으며,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경기도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정선은 65세부터 70세까지 현재는 서울에 편입된 경기도의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다. 이후 10여 년 동안은 관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제색도> 등의 명작을 남겼다. 79세인 1754년에 종4품인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을 거쳐 1756년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까지 올랐으니 관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정선이 그린 300년전 서울 풍경들.

정선이 그린 그림 중에는 18세기 한양과 그 주변 풍경을 담은 작품들이 돋보인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仁谷幽居)>와 이곳에서 쉬고 있는 정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를 비롯하여, <백악산(白岳山)>, <대은암(大隱巖)>, <청송당(聽松堂)>, <자하동(紫霞洞)>, <창의문(彰義門)>, <백운동(白雲洞)>, <필운대(弼雲臺)>, <경복궁(景福宮)>, <동소문(東小門)>, <세검정(洗劍亭)> 등은 300년 전 서울의 풍경화 그 자체이다. <청송당>의 그림에 그려진 큰 바위는 현재 경기상고 안에 그대로 남겨져 있고, <필운대>의 그림과 배화여고 건물 뒷 편에 위치한 현재 필운대의 모습을 비교하면 정선의 그림이 진경산수화임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최근에 인왕산에 위치했던 아파트가 철거되고 이 지역을 원형으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정선의 그림에 그려진 <수성동(水聲洞)>의 계곡과 다리의 모습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제목 그대로 서울과 주변의 명승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양의 주변 지역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양수리 부근에서 한양으로 들어와 행주산성까지 이르는 한강과 주변의 명승지가 25폭의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림을 그린 배경도 흥미롭다. 65세인 1740년 정선은 양천현령으로 부임했다. 이때 정선을 찾아온 벗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이별하면서 이런 제안을 하였다. ‘자신이 시를 지어 보내면 자네의 그림과 바꾸어서 보자고’. 이 제안은 1741년 [경교명승첩] 상하 2첩 25폭으로 완성을 보았다. 이 화첩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던지 정선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千金勿傳)”는 인장(印章)까지 남겨 두었다.

 

[경교명승첩]은 한강 상류의 절경을 담은 <녹운탄 綠雲灘>과 <독백탄 獨栢灘>에서 시작한다. ‘탄(灘)’은 ‘여울’이란 뜻으로, 현재의 양수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강 상류에서 시작한 그림은 현재의 서울 중심으로 향한다. <압구정(狎鷗亭)>은 조선초기 세도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 주변을 담은 그림이다. 그림의 중앙부 우뚝 솟은 바위 위에 별장이 위치하고, 백사장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이나 돛단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평화로운 풍경들이다. <광진(廣津)>과 <송파진(松坡津)>, <동작진(銅雀津)>의 그림들은 18세기에 이 지역이 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작진>에는 18척의 많은 배가 그림에 등장하며, 바다와 강을 왕래하는 쌍돛대를 단 배도 등장하고 있다. 물화(物貨)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한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행호관어(杏湖觀漁)>에는 고깃배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행호’는 지금의 행주산성 앞 한강으로 이 일대에 많은 고기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강의 명물이었던 웅어(멸치과의 바닷물고기로 남서해로 흘러드는 강어귀에서 많이 잡힘)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류하는 곳에 살았으며, 그 맛이 뛰어나 왕에게 진상하는 물품으로 사용되었다. <행호관어>에는 웅어가 뛰어놀았던 한강의 운치가 느껴진다. 남산의 풍광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이병연이 보내온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 떠오른다.’는 시에 맞추어 남산에 떠오른 일출의 장관을 그린 것이다. 이병연과 정선이 약속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화폭에 담은 금강산.

인왕산과 한강 일대 등 서울 주변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함께 정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은 바로 금강산 그림이다. 정선이 40대 이후 출사한 것은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에 나타나지만, 청년기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정선의 30대 행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두 차례에 걸친 금강산 여행이다. 그는 1711년 36세 되던 해에 처음 금강산을 다녀왔고, 이듬해에도 금강산을 다녀왔다. 1711년 8월의 여행은 평소 그를 후원했던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는 금강산행에 동행한 것이었는데, 정선의 절친한 벗이엇던 이병연이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이들을 맞아주기도 했다. 금강산을 다녀온 후 정선은 13폭의 그림을 남겼다.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그림에는, <금강산내총도>, <단발령망금강>, <장안사>, <불정대>, <벽하담>, <백천동장>, <옹천>, <고성문암관일출>, <해산정>, <총석정>, <삼일포>, <시중대> 등 금강산의 명소들이 그려져 있다.

 

금강산을 다녀온 후 꼭 1년만인 1712년 8월, 정선은 다시 금강산 유람에 나섰다. 금화현감으로 있던 벗 이병연의 부친과 동생, 후배 시인 장응도가 동행을 했다. 후원자이자 스승과 함께 했던 1차 금강산행과는 달리 조금은 편안한 기분에서 정선은 금강산을 다녀왔고, 총 30폭의 그림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으로 당시의 감흥을 남겼다. 이 그림에는 금강산 초입의 <금성 피금정>에서 시작하여, <단발령망금강>, <정양사> 등 내금강 그림들과, <불정대 망십이폭>, <백천교 출산도> 등 외금강 그림, <삼일포도>, <옹천도>, <총석정도> 등 해금강 그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철원의 삼부연과 곡운의 농수정을 그린 <철원 삼부연도>, <곡운 농수정도> 등으로 구성되었다. 삼부연과 농수정은 각각 김창흡과 김수증의 연고지로서, 정선은 자신을 후원한 안동 김문에 대해 최대의 성의를 보낸 것이었다.

 

1712년에 그린 [해악전신첩]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정선이 진경산수 화가로 명성을 쌓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정선은 청하현감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1734년 최고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다. 현재 삼성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금강전도(金剛全圖)>가 그것이다. <금강전도>는 마치 항공 촬영을 하듯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금강산 1만 2천봉을 장대하게 담아냈다. 1747년 72세의 정선은 다시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정묘년 해악전신첩]이다. 이외에도 정선은 부채에 그린 <정양사도>와 <금강전도>를 비롯하여, <만폭동도>, <비로봉도> 등 금강산을 소재로 한 명품들을 남겼다. 36세에 처음 실물을 접하고, 84세로 사망할 때까지 금강산은 늘 정선의 가슴속에 자리하였고, 정선은 다양한 필치로 금강산을 화폭에 담아 금강산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겸재의 유산.

정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독서여가(讀書餘暇)>가 있다. 이 그림은 툇마루에 나와 앉아 화분에 핀 모란을 감상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는데,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방안에는 책이 가득하여 정선의 독서벽을 알 수 있으며, 특히 그림으로나마 정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작은 즐거움이다. 정선은 76세 되던 해인 1751년 비안개가 걷힌 후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인왕산 모습을 최고의 필치로 그린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를 남겼고, 80세 이상 장수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붓끝에서는 18세기 조선의 풍경이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 정선의 위상이 높아졌다.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와 같이 우람하고 힘찬 산수화는 물론이고, 섬세한 붓 터치가 돋보이는 초충도(草蟲圖)에 이르기까지 정선은 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정선의 작품은 뛰어난 필치와 사실적인 묘사로 당시의 풍경들을 손에 잡힐 듯하게 한다. 정선이 살았던 인왕산과 북악산 주변의 그림들과, 배를 타고 가면서 그린 한강 교외의 그림들은 300년전 서울과 그 주변의 모습들을 생생히 복원시키고 있다. 진경산수화의 백미 정선의 그림들과 함께 600년 고도 서울과 한강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볼 것을 권한다.

Posted by motion7
조선 왕의 업적2013. 12. 4. 00:43

 

조선시대 효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그가 치국의 효시로 내세운 북벌(北伐)의 실체는 과연 있었는가. 재위 10년간 ‘숭명배청(崇明排淸)’과 ‘복수설치(復讎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에 신명을 바친 왕 효종. 그는 북벌의 완성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반청(反淸)을 외친 재야의 사림도 등용했지만, 복수를 위한 ‘10년의 꿈’은 무너졌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한지 5일 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이다. 효종은 인조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에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로 인조반정 후 봉작을 받아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되었다. 어머니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청주 한씨이며, 부인은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이다. 효종은 13세에 한 살 위인 인선왕후와 혼인하여 1남 6녀를, 후궁인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인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효종의 나이는 5세였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장난치거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행실이 무척 달랐다고 하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모습은 부친인 인조와 비슷하다. 또한 효심이 극진하여 채소나 과일같이 흔한 음식도 먼저 부친에게 올린 뒤에야 먹곤 했다. 인조는 효종을 두고 항상 인성이 훌륭하고 효심이 지극하다고 칭찬하여 주위의 사랑과 기대가 각별했다고 전한다. 1625년(인조 3)에 일곱 살 위인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먼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효종이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청나라 인질 생활과 귀국.

18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효종은 인조의 명령으로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1월 30일 효종은 부친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황제에 대한 경례법)’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지켜보아야 했다. 2월 5일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다. 볼모지로 가는 도중에 등에 업혀가던 세 살난 딸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청나라에 가서는 소현세자와 함께 명청(明淸)의 격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 사이 형제간의 우애는 점점 돈독해졌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고집하였고,서역을 공격할 때에도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하여 그를 보호했다.

 

효종은 1642년(인조 19)에 심양 관저에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을 낳았다. 현종은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왕이다. 효종은 26세인 1644년(인조 22)에 청나라에 있은 지 8년 만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청나라가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하자 소현세자와 함께 북경으로 들어갔다. 효종의 완전한 귀국은 1645년 5월 14일이다. 효종보다 앞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4월 26일에 급서(急逝)하자 20여일 만에 살얼음판 같은 본국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정통성의 약점을 안은 왕위 계승.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종통(宗統: 맏아들의 혈통) 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던 왕이었다. 이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청파인 김자점의 주도로 적장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세자에 올랐다. 이 무렵 효종은 자신을 왕세자로 명한 성명을 거두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왕세손으로 할 것을 울면서 간청하였다.

 

“작은 모기가 산을 짊어진다 할 때 참으로 산을 짊어짐을 기다리지 않아도 감당하기 어려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가 매우 어려운 때에 막중한 후사의 자리를 일개 불초한 신에게 부탁하시니, 이것이 어찌 모기가 산을 짊어지는 만큼만 어려울 뿐이겠습니까?”

[인조실록] 인조23년 윤6월

북벌의 추진과 송시열.

강빈의 신원을 주장하던 김홍욱이 맞아 죽자 민심은 요동쳤다. 효종은 김홍욱 사건을 무마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으니, 그 중 하나가 북벌이다. 그는 김상헌의 제자로 유배중이던 조석윤을 동지중추부사로 등용하고 송시열을 이조참의로 등용하는 등 북벌을 대의로 내세우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효종은 또 두 차례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경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1652년에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북벌에 대한 효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효종은 1659년 3월 11일 송시열과 독대하여 북벌의 대한 자신의 전략을 자세하게 피력했다.

“저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경(송시열)이 지난번 주자의 말씀을 들어 오랑캐가 중원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오. 지금의 한(汗- 청 군주)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주색에 깊이 빠져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군대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청을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쳐들어갈 계획이오.”

[송서습유] 권7 <악대설화> 중에서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결의에 찬 효종의 북벌 정책에 맞장구는 커녕 격물(格物)과 치지(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했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이자 종속관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효종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송시열은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질 뿐이었다.

 

효종은 과연 왕권강화만을 위해 북벌을 이용한 인물이었을까. 효종의 북벌정책이 불안한 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한 왕권 강화책이었음은 분명하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반청적(反清的) 사림세력의 지원이 필요했고, 반청적 사림세력 역시 재기를 위해서는 효종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 효종과 반청적 사림세력의 정치적 의도는 북벌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질 시절 청나라 전쟁터를 누빈 효종에게 북벌은 어쩌면 청에 대한 실질적인 불안감이었는지 모른다. 청나라는 반드시 멸망해야 하는 오랑캐였지만, 과연 멸망한 청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곳은 요동이었다. 중국을 차지한 청이 멸망하여 요동지역으로 돌아온다면 조선은 다시금 위기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조선은 계속적으로 청의 동향을 살펴야 했고, 국경에 대한 불안감은 숙종대까지 이어졌다.

 

의문스러운 효종의 죽음.

북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졌던 효종은 1659년 5월,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아침에 침을 맞은 효종이 사시(巳時: 오전 9시에서 11시)에 승하하였다고 하니 침을 맞자마자 운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궐 뜰에 있던 송시열과 정태화가 비보를 듣고 뛰어들어 갔지만, 효종의 싸늘한 주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효종은 한마디 유언도 없이 승하했다.

 

효종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그해 4월 2일에 그는 작은 가마를 타고 비원에 행차하여, 생의 마지막이 되어 버린 시를 읊었다.

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목이 새롭고 / 雨後晴光萬綠新
한 자리에 모인 늙은이와 젊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 一堂長少是君臣
꽃과 버드나무 속의 누대와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 / 花臺柳榭渾如畫
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는구나 / 時有鶯聲喚主人

[연려실기술] 권30, <효묘대점>

 

그런 다음 효종은 신하들에게 “9월 늦가을 단풍이 들면 그때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곧바로 슬픈 기색으로 “후에 만날 것을 어찌 약속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말을 남겼다. 딱 한달 뒤인 5월 4일 효종은 승하하였다.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타살설’에 무게를 두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효종의 종기를 터트려 죽게 만든 신가귀는 수전증이 심한 의원이었다. 그런데 종기를 터트리도록 명을 내린 사람은 효종 자신이었다. 이전에 효종이 말에서 떨어져 낙상으로 볼기에 종기를 앓았는데 신가귀가 침을 놓아 고쳤고, 이를 신뢰한 효종이 이번에도 그에게 침을 놓게 한 것이다. 그러나 수전증이 있었던 신가귀는 혈맥을 범하였다. 일설에는 신가귀가 혈맥을 잘못 범한 것이 아니라 종독(腫毒: 종기의 독)이 심하여 이것이 흉부에까지 퍼졌고 혈도(血道)가 종기에 집중되었는데, 함부로 침을 놓아 터뜨렸다고도 한다. 결국 효종을 죽게 만든 신가귀는 참형은 면하고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북벌을 효시로 내세운 효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군왕이었다.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고 심기일전,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효종은 서인과 남인은 물론 재야 사림의 지지를 상실하여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을 중용하였지만, 왕권과 신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조선시대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혹은 타살설이 도는 군왕의 공통점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신권은 항상 승전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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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주변나라 정세2013. 12. 4. 00:39

 

병자호란의 치욕과 청년 윤후의 다짐.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인조 임금이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청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사부 송시열(宋時烈, 1607~1689). 그는 남한산성에 있다가 인조가 항복하고 전쟁이 끝나자 보은 속리산 근처로 친척을 만나러 갔다. 보은 삼산(三山)으로 피난 가 있던 윤휴(尹鑴, 1617~1680)는 복천사(福泉寺) 앞에서 송시열과 만났다.

 

송시열로부터 굴욕적인 항복에 관한 전말을 들은 윤휴는 통곡하며 다짐을 말했다. “지금 이후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며, 좋은 때를 만나 벼슬길에 나가더라도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송시열은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휴와 만나 3일간 토론하고 나니, 내가 30년 독서한 것이 참으로 가소롭게 느껴졌다’고 말할 정도로 윤휴를 높이 평가했다.

 

윤휴는 그날의 다짐대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공주와 여주 등에서 독서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은 물론, 송준길, 이유태, 유계, 윤문거, 윤선거 등 주로 서인 계열 명유(名儒)들과 교유했지만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는 않았다. 1655년 시강원 자의에 임명됐고, 1658년에는 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지만 사의를 표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윤휴의 본관은 남원,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자는 희중(希仲)이다. 부친 윤효전(尹孝全, 1563~1619)은 광해군 때 벼슬을 지낸 인물로 학맥상 서경덕 계열에 속한다. 윤휴는 1617년 부친 윤효전이 경주 부윤으로 있을 때 태어났으나, 3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윤효전은 광해군 시절 임해군 제거에 공을 세운 점이 문제가 되어 인조반정 이후 관작을 박탈당했다. 13살 때 윤휴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비록 사후지만 관작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대립하다.

북벌을 염원하던 효종이 1659년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의 계비로 형식상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는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까?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부모는 장자상은 3년, 둘째 아들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 했다. 송시열과 서인 세력은 소현세자가 적장자이고 효종은 차자이기 때문에 기년복(1년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휴와 남인 세력은 왕통을 이은 효종이 장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인 세력은 국왕과 왕실도 보편적 예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천하동례(天下同禮)의 원리를, 남인 세력은 국왕과 왕실은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예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왕자예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신권(臣權) 강화로 집권 지배층 중심의 질서를 다지려는 서인 세력과, 왕권(王權)을 강화하며 새로운 권력 기반을 다져나가려는 남인 세력의 정치적 충돌이기도 했다. 논쟁의 결과는 장자와 차자 구분 없이 1년복으로 명시되어 있는 [경국대전]을 내세운 송시열과 서인의 승리였다.

 

열흘이 못 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병력과 강한 활 솜씨는 천하에 소문이 난데다가 화포와 조총을 곁들이면 넉넉히 진격할 수 있습니다. 병사 1만 대(隊)로 북경을 향해 나아가는 한편, 바닷길을 터서 정성공 (鄭成功: 청나라에 저항하여 명나라 부흥 운동을 전개한 인물) 세력과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러고는 연주, 계주, 요하 이북의 모든 지역과 여러 섬과 청, 제, 회, 절 등에 격서를 전하고 서촉까지 알려서 함께 미워하고 같이 떨쳐 일어나게 한다면 천하의 충의로운 기운을 격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1674년 7월에 올린 상소문 중에서

 

1674년 3월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 김수항 일행은 오삼계(吳三桂)가 일으킨 반란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했다. 산해관 일대를 지키는 명나라 사령관이었던 오삼계는 청군에게 산해관 문을 열어주고 북경의 이자성을 함께 공격하여 청나라에 협조한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평서왕에 봉해져서 운남 지역에서 독자적인 번(藩) 세력을 이루고 있다가 청나라가 철번령을 내리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 세력을 아울러서 ‘삼번의 난’이라 한다.

 

북벌의 꿈을 꾸던 윤휴는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판단했을 것이다. 윤휴가 현종에게 올린 위와 같은 상소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에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송시열은 북벌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효종은 신하들이 수치를 씻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에게 수신(修身)만 권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가장 적극적인 북벌론자는 재야에 있던 윤휴였던 것이다.

 

마침 조선의 정세도 급변했다. 1674년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한번 자의대비 의 복상(服喪)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제2차 예송논쟁이다. 이번에는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복설이 채택되고 서인은 실각했지만, 현종이 곧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즉위했다. 윤휴는 그해 말 상소를 올려 다시 북벌을 주장했지만 숙종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1675년 윤휴는 정4품 성균관 사업(司業)으로 조정에 진출하여 경연에서 숙종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10만 정병이 있고 식량도 쉽게 장만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 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關內)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습니다.”

 

좌절된 북벌의 꿈.

숙종은 물론이거니와 윤휴가 조정에 진출할 수 있게 한 남인 세력도 윤휴의 강경한 북벌론에 반대했다. 윤휴는 말로만 북벌을 외친 것이 아니라 군비 확충을 위해 세금 면제 토지를 없애고 호포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호포제는 양반과 상민을 불문하고 모든 호(戶)에 군포를 부과하는 제도여서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비록 집권했다고는 하지만 서인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던 남인 세력으로서도 호포제 시행으로 양반층 전체의 반발을 살 이유가 없었다. 호포제는 단순한 세금제도 차원을 넘어서 당시 조선 사회 질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윤휴는 일종의 전차라고 할 수 있는 병거(兵車) 제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산악이 많은 우리 지형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에 부딪혔고, 일부 지역에서 제작 사업이 시작되었다가 곧 중단되고 말았다. 대만에서 반청(反淸) 운동을 벌이던 정(鄭)씨 세력과 연합할 것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휴의 북벌론은 왕으로부터 집권 세력에 이르기까지 조정 내에서 비현실적이고 모험적인 주장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윤휴는 현실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큰소리만 쳐서 자기 명성만 높이고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주자와 다른 학문적 입장을 휘해 이단으로 지목 당하다.

“나의 저술 의도는 주자의 해석과 다른 이설(異說)을 내놓으려는 데 있다기보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기록하려는 데 있다. 내가 주자 당시에 태어나 그의 제자가 되었더라도 전혀 의문점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앉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혀 의심하지 않고 애매한 점을 놓아둔 채 뇌동(雷同: 줏대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임)한다면 허위가 될 뿐이니, 주자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에 송시열이 나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배척했다. 송시열의 학문은 주자의 가르침이라면 덮어놓고 논의를 용납하지 않으니, 주자를 존경하여 따른다 하더라도 이 어찌 진실로 체득했다 할 수 있겠는가?

-[도학원류속] 중에서

 

윤휴는 성리학의 이기론보다는 경학과 예학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중용]과 [대학]의 주해에 각별한 공을 들였고 [중용]에 대해서는 주자의 주석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장(章)을 나누어 주해함으로써 송시열에게 이단으로 지목 당했다. [대학]에 대해서도 주자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한 부분이 빠진 것 같다하여 보충한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윤휴는 하늘을 섬기고 하늘을 두려워하며 하늘을 경의하는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주자의 성리학보다는 고대(古代) 유학의 정신을 추구하고자 했다. 송시열은 ‘주자가 모든 학문의 이치를 이미 밝혀놓았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의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니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다’라며 비판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스러진 운명.

숙종은 남인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방수 천막을 보내려 했지만 허적이 이미 가져간 뒤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숙종은 조정 요직을 모두 서인 인물로 바꾸었다. 4월에는 인조의 손자이자 숙종의 친척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이 허적의 서자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했다는 고변이 있었다. 결국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득세했다.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윤휴는 폐지됐던 도체찰사부를 다시 설립해 허적이 당연직으로 도체찰사를 맡고 자신이 부체찰사를 맡으려 했으나, 숙종은 김석주를 부체찰사에 임명했다. 윤휴는 이에 대해 항의의 뜻을 나타내며 어전에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일종의 전시사령부로 모든 군사력을 통제하는 기구인 도체찰사부의 인사를 둘러 싼 윤휴의 태도가 경신환국 정국에서 다시 문제가 되었다. 더구나 숙종에게 숙종의 어머니를 잘 단속하라 얘기했던 것, 복선군 형제와 친했다는 혐의 등도 문제가 되었다.

 

서인 민정중이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 윤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다. 송시열은 ‘풀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답했다. 2차 예송논쟁 당시 윤휴도 송시열을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40여 년 전 속리산에서 의기투합하며 비분강개했던 두 사람은 이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사이였다. 1680년 5월 20일 윤휴는 사약을 받았다. 9년 뒤 1689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도 사약을 받았다. 18세기 이후 서인 노론 세력이 계속 집권하면서 윤휴는 이단시됐고, 그의 문집이 처음 나온 것은 1927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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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주변나라 정세2013. 12. 4. 00:35

 

곽재우(郭再祐, 1552~1617)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한 장수의 한 사람이다.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병’과 ‘홍의장군(紅衣將軍)’일 것이다. 그 표현대로 곽재우는 여러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기의(起義- 의병을 일으킴)했고, 여러 전투에서 홍의를 입고 지휘해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한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사례가 대표하듯이,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宣武)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찬송(辟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좀 더 엄혹했는지도 모른다.

 

가문과 성장.

곽재우는 1552년(명종 7) 8월 28일 경북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할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곽지번(郭之藩)이고, 아버지는 승지ㆍ관찰사를 역임한 곽월(郭越, 1518~1586)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다. 본관은 현풍(玄風- 지금의 경북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그곳에서 세거한 명문이었다.

 

그가 태어난 의령은 외가인데, 그 뒤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주요 지역이었고 그래서 지금 그를 대표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런 측면은 조선시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는 1565년(13세)부터 숙부 곽규(郭赳)에게서 [춘추]를 배우면서 학문을 닦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성여신(成汝信) 등과 함께 제자백가서를 널리 읽었다. 그가 나중에 도교와 깊은 친연성을 갖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곽재우는 1567년 15세의 나이로 만호(萬戶) 김행(金行. 본관 상산)의 둘째 딸과 혼인했다. 이 혼사는 그의 자질과 그것에 대한 인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장인 김행은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인 남명 조식(曺植, 1501~1571)의 사위였고, 따라서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사위가 된 것이었다. 손위 동서도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ㆍ대사성 등을 역임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이었다. 조식은 두 외손사위를 직접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망우집] <연보>). 인물을 보는 그의 안목은 정확했다.

 

곽재우는 18세 때인 1570년(선조 3)부터 활쏘기와 말타기ㆍ글쓰기 등을 고루 익히고 병법서도 공부했다. 1575~76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서 살았으며, 1578년(선조 11)에는 명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수행해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이때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은 그 뒤 임진왜란에서 그의 상징이 된 홍의(紅衣)의 옷감이 되었다.

 

10대 후반부터 문무를 함께 연마하던 곽재우는 32세 때인 1585년(선조 18) 별시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선조는 그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해 그 별시의 합격을 모두 취소시켰다.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는 크게 낙망했을 것이다.

 

불행은 거듭 찾아왔다.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곽재우는 선산인 현풍 신당(新塘)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1588년에 탈상했다. 36세였다.

 

그 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의령 동쪽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근처 둔지(遯池)에 정자를 짓고 낚시질을 하면서 지냈다. [망우집(忘憂集)- 곽재우의 문집]에 실린 <연보>에는 그 2년 동안 “강가의 정자에 있었다(在江亭)”고만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처사적 삶은 세속과 어느 정도 절연한 것이었지만, 일정한 경제적 기반 없이는 영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광해군일기]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서는 이때 그가 그냥 은둔한 것이 아니라 농업경영에 힘써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했다(1617년(광해군 9) 4월 27일).

 

곽재우의 재력은 실제로 작지 않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곽재우의 전공을 보고한 장계에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그의 집안이 매우 부유했는데 의병을 모집하는 데 재산을 모두 희사(喜捨- 목적을 위해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했다고 기록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의병활동에 참가한 양반들은 대부분 수백~수천 마지기(斗落)의 토지와 200~300명의 노비를 소유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하면, 곽재우도 그것과 비슷한 경제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정한 방법이 아닌 이상 축재는 나쁜 일이 아니다. 김성일이 지적했듯이, 중요한 사실은 그런 재산을 창의(倡義)하는 데 쾌척했다는 것이다. 조선 최대의 국난은 곽재우가 은거한 지 4년 만인 1592년 4월에 발발했다. 그때 곽재우는 40세의 장년이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기의와 승전.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 된 4월 22일에 고향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기의는 호남ㆍ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부대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최초의 의병이었다. 이런 정황에는 그가 살던 의령이 일본군의 초기 침략지역과 가까웠다는 까닭도 작용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그의 애국심과 실천력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의 부대는 거느리던 노비 10여 명으로 출발했지만, 이웃 양반들을 설득해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뒤 그의 의병은 2천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1593년(선조 26) 1월 11일).

 

첫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그 까닭은 불리한 전황이 아니라 조정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의 부대는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이런 행동을 오해해 그들을 토적(土賊- 지방에서 일어난 도둑 떼)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ㆍ영산(靈山. 지금 창녕)ㆍ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우선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 경남 의령 소재.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나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조선군이 이긴 최초의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7월에는 현풍ㆍ창녕 등지에서 승리해 경상우도에서 왜군의 진격을 차단했고, 왜군에 항복해 길잡이 노릇을 하던 공위겸(孔撝謙)을 매복작전으로 체포해 처형했다. 10월에는 왜란 초반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전투였던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해 승전에 기여했다.

 

곽재우가 구사한 전술은 기본적으로 유격전이었다. 그는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ㆍ매복전술 등의 변칙적 방법으로 적을 교란하고 무찔렀다. 이것은 전력과 물자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의병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을 것이다.

 

곽재우는 이런 전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계속 승진했다. 그는 유곡찰방(幽谷察訪. 1592년 6월. 종6품)·형조정랑(8월. 정5품)을 거쳐 경상도 조방장(助防將. 정3품)에 임명되었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만에 그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에 올랐다.

 

불화와 낙향.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금방 끝날 것 같던 임진왜란은 내륙의 의병과 해전의 이순신이 활약하면서 1593년 후반부터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전황의 변화에 따라 곽재우의 역할도 바뀌었다. 그동안도 그는 왜군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산성을 거점으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 1594년부터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 가야산의 용기(龍起)산성, 지리산의 구성(龜城)산성 등 경상도 일대의 산성을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순신ㆍ원균 등과 함께 거제도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지만,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12월에는 가장 주요한 격전지 중 한 곳인 진주목사에 임명되었고, 경상도 관찰사ㆍ경상우수사 같은 요직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본관인 현풍으로 낙향했고, 거기서 2년 동안 칩거했다. 승전을 거듭해 계속 중용되던 의병장이 갑자기 낙향한 이례적인 사태의 가장 큰 까닭은 조정과의 불화였다.

 

앞서도 그랬지만 그 뒤 처사로 은둔해 곡기를 끊고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행적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곽재우는 기본적으로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저런 갈등을 일으켰다.

 

첫 사례는 전란이 일어난 직후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粹)와 관련된 것이었다. 1592년 6월 김수가 패전하자 곽재우는 그를 패장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도 곽재우가 역심을 품었다고 맞섰다. 이 대립은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1594년 거제도 작전에서도 곽재우는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었다. 나중에 두 사안 모두 곽재우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은 곽재우의 자세는 상당한 반발을 가져왔다.

 

이런 마찰로 형성된 가장 중요한 결과는 국왕 선조가 그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낙향한 뒤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을 중심으로 그를 다시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선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나는 이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1595년(선조 28) 12월 5일). ·····곽재우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의 처사를 보니 참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도체찰사가 격서를 보내 불렀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함부로 병권을 맡길 수 없다(1596년 2월 18일).” 왕명을 대행하는 도체찰사의 부름에 곽재우가 따르지 않자 선조는 그가 왕명을 무시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런 불신은 이때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발원은 앞서 말한 김수와의 충돌이었다. 그때 선조는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자신의 병력을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1592년 8월 7일)”고 물었고, 나아가 “이 사람이 함부로 감사를 죽이려고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연려실기술] 권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

 

권력자의 한 속성은 의심이고, 그런 성향은 위기의 국면에서 더욱 짙어지곤 한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이순신에게 그랬듯이, 뛰어난 무공을 세운 의병장을 보는 국왕의 이런 태도는 상당한 문제였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정유재란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는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 종2품)에 기용되었다. 일단 그는 현풍의 석문(石門)산성을 수축해 주둔하다가 창녕의 화왕(火旺)산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왜란에서 곽재우의 활약은 여기서 끝났다. 복상(服喪) 때문이었다. 1597년(선조 30) 8월 계모 허씨가 별세하자 그는 현풍의 선영에 장사지낸 뒤 강원도 울진(蔚珍)으로 피신해 삼년상을 치렀다. 복상 중에도 기복(起復)하라는 명령이 몇 차례 내려졌지만 그는 상중이라고 거절했다.

 

그동안 거대한 전란은 끝났다. 탈상한 곽재우는 1599년 10월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에 임명되어 그 지역의 군무를 총괄했다. 당시로서는 노년의 초입에 접어든 48세였다.

 

당쟁과 은거.

조선 후기 주요 인물들의 삶을 규정한 핵심적 조건은 당쟁이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학문과 혈연관계가 복잡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었고, 그래서 그 영향과 파괴력은 넓고 깊었다.

 

곽재우도 당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조식의 외손사위라는 혼인관계가 보여주듯이 북인계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전란 동안 그를 계속 추천하고 인정한 인물도 김성일(초유사. 1592~93년)ㆍ유성룡(영의정. 1593~96년)ㆍ이원익(체찰사. 1597~98년) 등 남인계 중신들이었다.

 

곽재우의 정치적 시련은 전란이 끝난 뒤에 닥쳤다. 그때 대부분의 인물이 그랬듯이, 그 시련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개진해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1600년(선조 33) 2월 붕당의 대립과 거기서 발생한 영의정 이원익의 파직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사직한 것이었다. 그는 국왕의 재가를 받지도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선조는 “장 1백 대에 멀리 유배 보내도 모자란다”면서 대노했다. 결국 그는 대북계 중진인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으로 전라도 영암(靈巖)에 3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처음 겪은 주요한 정치적 시련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되지만, 그가 자신의 당색을 남인으로 자정(自定)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1602년(선조 35)에 해배되어 현풍으로 돌아온 뒤 익힌 밥을 멀리하고 솔잎만 먹었다. 그리고 영산 창암(滄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했다. <연보>에서는 이때 그의 생활을 “쓸쓸한 도인 같았다(蕭然若一道人也)”고 적었다.

 

국왕의 분노를 산 그가 공로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듬해 공신도감에서는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참으로 그의 공로”라면서 공신 책봉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장수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가 왜적을 막은 것은 양(羊)을 몰아 호랑이와 싸운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이 수전에서 세운 공로가 으뜸이고, 그밖에는 권율의 행주전투와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기대에 부응했으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했다. 그 중에 잘했다는 사람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1603년 2월 12일).”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 뒤 1605년(선조 38) 2월에 그는 동지중추부사ㆍ한성부 우윤(종2품)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두 달만에 병으로 사직한 뒤 줄곧 망우정에서 지냈다. 1607년 1월에는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방문해 함께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노년에 접어든 56세 때의 일이었다.

 

해평(海平)부원군으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당시의 주요한 대신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그가 곡기를 끊은 까닭을 이렇게 짚었다. “곽재우가 솔잎만 먹는 까닭을 도술을 닦으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김덕령이 뛰어난 용력으로도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죽자 자신도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이것을 핑계로 세상을 도피하려는 것이라고 한다(1608년 8월 13일).”

 

낙향과 별세.

관계가 불편했던 선조가 붕어하고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즉위하면서 곽재우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그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고 상경을 재촉했다.

 

그때 곽재우의 삶은 청빈함을 넘어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교지를 갖고 찾아갔던 금군(禁軍)은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아주 초라했고, 병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했다”고 보고했다. 곽재우의 아들은 아버지가 상경하려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타고 갈 말과 종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벌옷도 다 해져 날씨가 추우면 길을 떠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국왕은 즉시 의복을 지급하라고 하명했다(1608년(광해군 0) 9월 14일).

 

그 뒤 1610년(광해군 2) 곽재우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ㆍ한성부 좌윤(종2품)으로 임명되어 잠깐 상경했지만, 역관(譯官)과 원접사(遠接使)가 왕명을 무시했다고 비판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낙향했다.

 

2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용맹하고 고결한 의병장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서울에 있는 동안 이원익ㆍ이덕형 같은 중신들이 자주 찾아왔고, 사대부들도 그를 만나려고 몰려들어 집에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아이들까지도 그를 보려고 거리를 메웠다(<연보>).

 

그 뒤 별세할 때까지 곽재우는 계속 망우정에 머물렀다. 앞서 말한 빈한한 환경이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처럼 “강가의 정자에 있었다”는 이 시기 <연보>의 짧은 표현은 그런 쓸쓸함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타협하지 않는 곽재우의 직선적인 성품은 별세하기 전에 한번 더 표출되었다. 그때 조정의 가장 큰 논란이었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사사하는 문제와 관련해 곽재우는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1613년(광해군 5) 5월). 이 때문에 그는 대북(大北)의 탄핵을 받아 사사될 뻔했지만, 장령 배대유(裵大維)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다.

 

노쇠한 의병장은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1617년 3월 병이 깊어지자 그는 “생사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라면서 치료를 중단했고, 4월 10일 망우정에서 별세했다. 65세였다. 그 뒤 지금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안장되었고, 그를 모신 사우(祠宇)에는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현판이 내려졌으며,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문집은 [망우집]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좌찬성을 지내고 호성(扈聖)공신에 책봉된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은 이런 시를 지어 곽재우를 칭송했다([망우집], <망우선생전> 및 [연려실기술] 권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

 

곽분양은 당 현종 때의 곽자의(郭子儀, 697~781)로,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로를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책봉된 인물이다. 그는 관원으로 성공했고 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도 번창해 세속에서 지복(至福)을 누린 인물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노년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자손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곽분양 행락도(行樂圖)>는 성공과 행복의 상징으로 자주 그려졌다.

 

추측일 뿐이지만, 이호민은 두 사람이 같은 성씨의 무장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곽재우의 무운과 성공을 기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뒤 곽재우의 삶은 곽분양과 전혀 달랐다. “쓸쓸한 도인 같던” 곽재우의 벽곡과 은거가 불행했는지, 아니면 탈속의 자유로 충만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화려한 출세가 행복의 필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조선 후기의 주요 인물이 대부분 당쟁의 여파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복잡성과 함께 착잡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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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주변나라 정세2013. 12. 4. 00:31

전쟁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폭력과 참혹한 피해를 수반하지만, 역설적으로 기술의 발전과 문명의 교류에도 중요하게 기여한다. 그리고 역사상 많은 영웅들은 전쟁의 산물이었다. 이런 모순적 진실은 인간과 역사의 양면성을 착잡하지만 또렷하게 보여준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란은 임진왜란이었다. 흔히 양란이라고 불리는 호란과 그것은 전쟁의 기간, 전장의 범위, 피해의 규모, 전개의 과정, 결과와 영향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사뭇 달랐다. 호란과 달리 왜란은 전면적이었고 장기전이었으며, 따라서 피해와 파괴의 결과도 그만큼 거대했다.

 

권율(權慄, 1537~1599)은 거의 멸망할 뻔한 나라를 구하는데 중요하게 기여한 대표적 장수였다. 그가 지휘한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승전의 하나로 손꼽힌다.

 

휼륭한 가문

권율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이다. 그의 9대조는 고려 후기의 유명한 문신인 권부(權溥)였다. 권부는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修文殿大提學領都僉議使司事)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으며, 특히 당시의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인 이제현(李齊賢)의 장인이었다.

 

권율의 조부는 강화부사(정3품) 권적(權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1503~1578),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영의정이라는 관직이 상징하듯이, 권철은 명종 때부터 선조 초반까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신하였다.

 

권율의 가계에서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그의 사위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었다는 것이다. '오성과 한음'으로도 널리 알려졌듯이, 이항복은 영의정까지 역임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신이었다.

 

다소 늦은 출세.

권율의 출세는 다소 늦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1582년(선조 15)에 4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의 평균 수명과 보통 30세 전후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통계에 비추어 이것은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다. 성적도 상위가 아니라 중후위에 걸쳐 있는 병과(丙科, 11~33등)였다.

 

그는 승문원 정자(正字, 정9품)로 벼슬을 출발해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사헌부 감찰(監察, 종6품)·예조좌랑(정6품)·호조정랑(정5품)·전라도 도사(都事, 정5품)·경성판관(종5품) 등의 관직을 거쳤다. 급제한 나이로 보나 이런 관력으로 보나 그의 출세가 그리 화려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당시의 나이로 보면 노년일 55세 때 자신의 일생은 물론 국가의 운명에 거대한 영향을 준 전란을 맞았다. 그는 거기서 출중한 전공을 세웠고,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다.

 

왜란의 발발과 승전.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권율은 호조정랑이었다가 서북 지역의 최변방인 의주(義州)목사로 발령되었지만 이듬해에 해직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왜란이 일어났을 때, 관직을 떠나 있던 것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광주(光州)목사에 제수되었다. 아마도 이전에 전라도 도사였던 경력이 참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잘 알듯이 왜란의 초기 전황은 도성이 개전 한 달 만에 함락될 정도로 속수무책의 패배였다. 왜군의 침략에서 무사한 지역은 전라도밖에 없었다. 권율은 거기에 일익(一翼)을 담당했다.

 

권율은 처음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 휘하의 중위장(中衛將)으로 배속되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했다. 수원·용인 부근에 이르렀을 때 권율은 지공(遲攻)을 건의했지만, 이광 등 수뇌부는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패였다. 권율은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물러나 기회를 기다렸다.

 

처음이자 중요한 전공은 이치(梨峙, 배재) 전투였다. 개전 석 달 째인 1592년 7월 8일, 권율과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은 금산(錦山) 서쪽의 이치에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을 맞았다. 그때 일본군은 전주(全州)를 함락시키기 위해 웅치(熊峙)와 금산으로도 진군하고 있었다. 두 곳에서는 왜군에 패배했지만, 이치에서는 황진이 부상당하여 후방으로 후송되는 격전 끝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권율은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했다. 이치 전투의 승리는 이순신의 해전과 함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보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승전의 공로로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두 번째의 승전은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 전투였다. 같은 해 12월 권율은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북진해 경기도 오산의 독성산성에 주둔했다. 거기서 그는 우키타(宇喜多秀家)가 이끈 왜군과 접전해 다시 승리를 거뒀다. 권율은 도성 수복을 위해 다시 전진했다. 그가 선택한 거점은 행주산성(幸州山城)이었다.

 

행주산성의 대첩

권율이 행주산성을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조방장 조경(趙儆)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병 1천 명을 이끌고 합류했다. 그러나 총 병력은 수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12일 오전 6시 무렵 시작되었다. 왜군은 우키타(宇喜多秀家)의 지휘 아래 이시다(石田三成)·마시다(增田長盛)·오타니(大谷吉繼) 등이 3만 여명의 군사를 7개 부대로 나누어 진격했다. 그러니까 병력으로 보면 조선군은 4~5배 정도의 열세였다. 그때 조선군은 활·칼·창 같은 일반적인 무기 외에 화포와 석포(石砲- 돌을 날려보낼 수 있는 대포) 등의 특수 무기가 있었으며, 성책을 이중으로 만든 상태였다.

 

왜군은 고니시(小西行長)·이시다·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끈 1~3대가 차례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 제1성책을 넘지 못하고 격퇴되었다. 총대장 우키다는 격노했고, 직접 자신의 제4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전진했고,  제1성책을 넘어 제2성책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권율의 독려로 조선군은 다시 반격했고, 우키다와 이시다를 집중 포격해 부상을 입혀 격퇴시켰다.
 
왜군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다. 제5대장 깃카와(吉川廣家)와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는 제2성책을 공격해 일부를 불태웠다. 조선군은 위기에 몰렸지만, 처영이 이끈 승군의 활약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제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 형태도 사력을 다한 백병전으로 바뀌었다. 왜군의 마지막 공격은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이끌었다. 그들은 승병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성 가까이까지 진격했다. 전투의 승부처인 이때 조선군과 백성들은 권율의 지휘로 합심해 행주산성을 지켰다. 무기가 떨어진 조선군은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짧게 잘라 거기에 돌을 운반해 전투를 도왔다.

 

'행주치마'라는 유명한 이름은 바로 이런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지만, 1527년(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이미 "부엌일을 할 때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덧입는 작은 치마"라는 의미로 '치마'라는 단어가 실려있다는 증거(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로 볼 때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조선군은 격전에서 승리했고, 권율은 중요한 장수로 급격히 떠올랐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자군의 시체를 불태워 없애버렸기 때문에 노획한 시체는 2백여 구밖에 되지 않았지만, 타다만 시체는 셀 수 없었으며 노획물도 매우 많았다.
 
앞서 말했듯이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힌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결정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왜란의 종결과 별세

행주대첩 이후인 1593년 중반부터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권율은 행주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김명원(金命元)의 후임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도원수는 그 명칭대로 전쟁을 총괄하는 사령관이었다. 권율은 주로 영남에 주둔했는데, 그 뒤 한성부 판윤·호조판서·충청도 관찰사로 옮겼다가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이후 권율은 뚜렷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장(明將) 마귀(麻貴)와 울산으로 진격했지만, 역시 명의 장수인 양호(楊鎬)가 퇴각을 지시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서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역시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이 협조하지 않아 실패했다.

 

임진왜란의 중심적 장수였던 권율은 전란이 끝난 직후인 1599년(선조 32)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한 뒤 그 해 7월에 62세로 별세했다. 전쟁의 영웅에게 수여한 국가의 추숭(追崇)은 성대했다. 그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에는 선무(宣武) 1등공신과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841년(헌종 7)에는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해 그곳에 배향되었다. 그가 왜란에서 활약한 공훈은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권율은 다소 늦은 나이로 출사한 문신이었지만, 거대한 전란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구국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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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화재2013. 12. 2. 16:07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허준(許浚, 1539-1615)은 신묘한 의술로 박애를 실천한 ‘의성(醫聖)’이 되고, 신분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의 일생을 추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허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대부분은 소설과 드라마의 상상력일 뿐이다.

 

동의보감을 편찬하다.

임진왜란으로 큰 혼란을 겪던 조정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고 있던 1596년 선조는 허준을 불러 명했다.

 
“요즘 중국의 방서를 보니 모두 자잘한 것을 가려 모은 것으로 참고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너는 마땅히 온갖 처방을 덜고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라.”


그 무렵 명대의 신의학이 적지 않게 조선에 수입되어, 조선 전기의 의학전통과 섞이는 바람에 이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전란을 겪으며 기근과 역병이 발생해 제대로 된 의서가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명하면서 선조는 그 책의 성격을 분명히 제시했다. 첫째, 사람의 질병이 조섭을 잘 못해 생기므로 수양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할 것. 둘째, 처방이 너무 많고 번잡하므로 요점을 추리는 데 힘쓸 것. 셋째, 국산 약 이름을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왕명을 받은 허준은 정작·양예수·김응탁·이명원·정예남 등 당대의 인재들과 함께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가 1601년 무렵 다시 재개되었다. 이때부터는 허준이 단독으로 작업했는데, 14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총 240여 종의 의서들을 참고하여 쓴 책이 [동의보감]이다.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어릴때부터 학업에 열중.

허준은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관 출신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낸 인물이며, 아버지 허론(許碖)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어머니 김씨가 첩이기는 했으나 천출은 아니었다. 양반 가문의 서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법 권세 있는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자란 허준은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고 전한다.

 

허준이 왜 의학을 선택했고, 어떤 과정을 밟으며 공부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왔던 유의태라는 스승도 허구의 인물이고, 허준이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해 놀랄 만한 깨달음을 얻는 드라마틱한 사건도 작가의 상상력일 뿐이다. 내의원에 들어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선조 때 유학자인 유희춘(柳希春)의 문집이 유일하다. 그 문집에 남아 있는 허준의 모습은 유희춘이나 일가의 병 치료에 참여하기도 하고, 유희춘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살림살이가 궁색하지 않았고 의술이 제법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569년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유희춘의 신임을 얻었다.

 

유희춘은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덕분인지 몇 년 뒤 허준은 종4품 내의원 첨정의 자리에 오른다. 서른한 살에서 서른세 살 사이의 일인 듯하다. 당시 의과의 초시와 복시를 1등으로 합격해서 얻을 수 있는 관직이 종8품이었다고 하니 허준이 얼마나 파격적인 승진을 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허준은 의과도 통과하지 않았고 서자 출신이었다. 의원으로서 크게 인정을 받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내의원에 들어와 의서 편찬에 참여.

파격적인 승진으로 내의원에 들어왔으나 한동안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던 듯하다. 1575년 어의를 보조하여 왕의 맥을 진찰했고, 1581년 선조의 명으로 [찬도방론맥결집성]이라는 진맥학 책의 오류를 바로잡아 책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했으며, 1587년 다른 여러 어의와 함께 왕의 진료에 참가하여 병의 쾌유에 대한 상으로 사슴 가죽을 받았다는 등 몇 년에 한 번씩 단편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왕명으로 진맥학 책을 전술했다는 기록을 보면 학술적으로 인정은 받았던 듯하다.

 

그러던 중 1590년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면서 비로소 남다른 의술을 인정받는다. 당시 왕자의 신분이었던 광해군은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병이 깊었다. 다른 의원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허준이 과감히 나서 병을 고치자 선조는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리며 그 공을 치하했다. 서얼 출신의 기술관이었던 허준에게 당시의 신분구조상 허용되었던 벼슬은 정3품의 당하관이 최대였다. 그런데 그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중 다시 한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면서 동반(東班)에 올라, 신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동반이란 양반 중 하나인 문관을 뜻하는 것으로, 동반에 올랐다는 것은 곧 완전한 양반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또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자신을 끝까지 따른 문무관이 열일곱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던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한 공을 인정해 허준을 공신에 책봉하고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렸다. 품계로만 따지면 좌찬성, 우찬성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조는 허준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내리려 했다. 1606년 오랫동안 차도가 없던 병세가 호전되자 관직의 최고 단계인 정1품 벼슬을 내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신분 질서를 그르치는 잘못된 조치라고 맹렬히 반대하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에 성사되지는 않았다.

 

유배지에서 편찬한 명저, 동의보감.

조선 왕조가 개국된 이후 의관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에 올랐지만, 영광은 그리 길지 않았다.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망령되어 약을 써서 선조를 죽게 했다.”는 죄로 유배 길에 올라야 했다. 허준의 의술로 목숨을 구한 적이 있던 광해군은 “허준의 의술이 부족하여” 선조를 살리지 못했을 뿐 고의가 아니니 처벌할 수 없다며 감쌌지만, 신분을 뛰어넘은 그의 입지에 문관들의 질시와 견제가 만만치 않았던 상황이다 보니 광해군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귀양살이는 1년 8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커다란 시련이었던 이 기간을 허준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되는 [동의보감] 편찬에 바쳤다. “정(精), 기(氣), 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의 양생학적 신체관과,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위주로 한 의학적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통합했다.”는 평을 받는 이 책은 이후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오늘날까지도 한의학도에게 널리 읽히는 명저이다. 1609년 사간원의 극심한 반대에도 광해군은 당시 일흔한 살의 허준을 내의원에 복귀시켜 자신의 병을 돌보게 했다. 한양에 돌아온 그는 마침내 완성한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쳤고, 이후 역병에 관해 저술한 [신찬벽온방] [벽역신방]을 편찬했다. 그러다 1615년 일흔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 뒤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가 추증되었다.

 

 

 

신화가 된 의사.

허준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허준은 제서(諸書)에 널리 통달하여 약을 쓰는 데에 노련하다.”는 선조의 평과, “허준이 저미고란 약으로 많은 사람의 두창을 고쳤다.” “근래에 오직 박제가, 손사명, 안덕수, 양예수, 허준 등이 의원으로 이름이 나 있다.”는 이수광의 평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동의보감]이 세상에 나와 조선 의서의 어머니가 되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지면서 허준의 의술은 신화가 되어갔다.

 

18세기 중엽에 나온 [약파만록]이라는 책에는 허준이 코끼리를 고쳐주어 명성이 자자해졌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 살이 붙어, 아픈 호랑이를 고쳐주고 금침을 얻은 허준이 그 금침으로 중국 천자의 병을 고쳐준 뒤 천자의 병을 고치지 못한 죄로 옥에 갇힌 중국 의원들을 풀어주자 그 의원들이 자신들이 아는 것을 모두 책에 적어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의보감]이라는 설화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사실 이런 신화의 옷을 다 벗기더라도 허준은, 사상의학을 창안한 이제마가 역대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장중경, 주굉에 이어 세 번째 인물로 선정할 정도로 뛰어난 의학자이다.

Posted by motion7
조선의 문화재2013. 12. 2. 16:04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되어 있다. ‘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 측면은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이나 ‘시선’ 이백(李白)과 대비되어 ‘시성’으로 지칭되는 두보(杜甫)의 삶과 작품을 생각하면 수긍될 것이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거칠고 파괴적인 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형태의 폭력은 전쟁이다. 이순신은 그런 전쟁을 가장 앞장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무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돌파해야 할 역경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훨씬 가혹했으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거대한 운명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인간의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만하다.

 

가계와 어린시절.

이순신은 조선 인종 1년(1545) 3월 8일(음력 기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다.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신(臣)’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성군을 만났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의 한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가문은 한미하지는 않았지만 현달했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의 선조들은 우뚝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관직과 경력을 성취했다. 우선 6대조 이공진(李公晉)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정3품)를 지냈다. 가장 현달한 인물은 5대조 이변(李邊, 1391~1473)으로 1419년(세종 1) 증광시에서 급제한 뒤 대제학(정2품)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1품)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고 8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되는 영예를 누렸고,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증조부 이거(李琚)도 1480년(성종 11)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정5품)과 병조참의(정3품)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비교적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세를 이어왔던 이순신의 가문은 그러나 조부 때부터 침체하기 시작했다. 조부 이백록(李百祿)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당연히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 주요한 까닭은 이백록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간주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묘사림이 시행한 별과(別科)에 천거된 1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기묘사림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명단과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기묘록 속집]에서는 “진사 이백록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소했다”고 적었다. 이런 가문의 상황에 따라 혼인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는데, 외조부 변수림(卞守琳)도 과거와 벼슬의 경력이 없었다.  

 

몇 살까지라는 확실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이순신은 태어난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이순신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에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조선 태종의 가장 큰 치적은 세종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유성룡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의 혜안은 나라를 멸망에서 건졌다.

 

아직 어렸고 나중에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이 그때 어떻게 어울렸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 유성룡은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기억에 따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인상 깊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인생의 방향 등도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유년 시절에만 국한된 관찰은 아니라고 추정되는데, 유성룡이 기억하는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기개가 넘쳤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그 눈을 쏘려고 했다”는 대목은 어린 아이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례하거나 거칠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혼인과 급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그 뒤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렇게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李葂,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그동안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는 이런 학업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는 유성룡의 회고는 이때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년(선조 5)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년(선조 9)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였으며,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부침이 심하고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험난한 관직 생활.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다. “석문과 사곡은 호랑이들의 소굴로 우리 영토를 엿보네. 골짜기가 갈라져 하늘은 틈이 생겼고, 강이 깊어 땅은 저절러 나뉘었네(石門與蛇谷, 虎穴窺我藩. 峽坼天成罅, 江深地自分)”라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시([동구비보를 지나며(過童仇非堡)], [학봉속집] 제1권)는 그런 거친 환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년(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이 그렇고 바로 그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런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징비록]에서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인간의 주요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나 직위의 획득과 관련된 측면이 많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면 권력이나 재력도 그만큼 팽창하기 때문이다.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그 사람을 알아주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그 사람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년(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았던 거대한 국난을 생각하면,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교로운 천행이었다.

 

임진왜란,승전과 백의종군.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월 22일).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월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년(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초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菶)․분(芬), 아들 울(蔚-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주목하고 뛰어난 통찰력과 감동적인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이 날의 일기는 이순신의 내면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자료의 하나로 생각된다. 일기는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내밀한 기록이다. 후세에 공표될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그럴 의도를 담은 일기도 적지 않고 [난중일기]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평가되지만, 그럼에도 이 날 그의 문장은 전율과 놀라움을 안겨준다.


그 글에서 작성자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적었다. 그동안 승전을 거듭해 국망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갑작스레 압송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은 사람에게서 상상할 수 있는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는 철저하게 제어되어 있다. 그는 오직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했고, 승리의 원동력과 그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는 한 관찰과 평가는 정곡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 짧은 일기는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이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4월 13일). 그는 나흘 동안(4월 16~19일)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이때의 일기, 특히 맨 마지막 구절은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마음을 느끼게 한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中方浦)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정유재란,복귀와 전사.

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월 16일)과 전주(8월 25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월 3일).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그는 명량(鳴梁)해전에 나아갔고(9월 16일),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그때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담겨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속히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이순신의 절망과 피로는 셋째 아들 이면의 죽음으로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수많은 죽음을 집행했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52세의 아버지는 다시 한번 통곡했다.

 

(10월) 14일 신미. 맑았다. ····· 저녁에 사람이 천안(天安)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정신 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뉘게 의지한단 말인가.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거대한 전란과 그 전란의 가장 중심에 있던 인물의 생애는 동시에 끝났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되었다. 그뒤 구국의 명장을 국가에서 추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604년(선조 37) 선무(宣武) 1등공신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책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년(정조 17)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2년 뒤에는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국가적 시책은 그의 위상에 부동의 공식적 권위를 부여했지만, 견고한 갑각 안에 가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측면과는 달리 이순신의 인간적 내면을 깊이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것은 김훈의 [칼의 노래](2000)일 것이다.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비평과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 소설은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이순신의 마음과 생각을 추적한 작품이다.


작가는 오래 전부터 주관이 배제되고 사실만이 남은 문장을 쓰고 싶었는데, [난중일기]에 그런 문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순신의 마음과 문장을 이렇게 파악했다. “암담한 패전 소식이 육지로부터 전해오는 날, 이순신은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고 썼다. 슬프고 비통하고 곡을 하며 땅을 치고 울고불며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거기에 무슨 형용사와 수사학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당할 도리가 없다. 이것은 수사학의 세계가 아니라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다.” 그는 그것을 “죽이는 문장”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순신에 관련된 글은 수없이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비평은 그 주체와 대상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수준에 있거나 오랫동안 깊이 관찰하고 생각해야만 합리성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지 못한 이 글은 부족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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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화재2013. 12. 2. 15:59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사적 제108호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 즉 문익점정천익이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터가 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을 기리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있다. 1461년(세조 7) 문익점을 기리는 사당(祠堂)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무너진 것을 중건하여 1787년(정조 11)에 도천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린 것이 그 유래다. 도천서원에서는 매달 초하루 남평 문씨 문중의 제사가 거행되는데, 제사상에 목화솜을 올린다.

 

태조 7년(1398) 6월 중에 전 좌사의대부 문익점이 세상을 떠났다. 문익점은 갑진년에 진주에 도착하여 가져온 씨앗 반을 본 고을 정천익에게 주어 기르게 하였는데 하나만 살았다. 천익이 가을에 씨를 따니 100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그 씨를 향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심어 기르게 하였다. 중국 승려 홍원이 천익의 집에 머물며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가르쳤는데,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 한 필을 만드니, 마을에 전하여 10년이 못되어 온 나라에 퍼졌다. ([태조실록])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강남 지방에서 3년 간 귀양살이를 한 끝에, 반출이 금지된 목화씨를 붓두껍에 몰래 숨겨 고려로 돌아왔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 그런 이야기로 어린이 위인전기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이다. 오늘날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난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원나라로 가는 사신단에 서장관으로 뽑혀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했다.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왔다’는 것은 조선 후기부터 유행된 이야기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기록에는 그가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거나 그냥 ‘얻어 갖고 왔다’라고만 되어 있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의 ‘양업기’라는 글에서 상투 속에 씨앗을 숨겨왔다는 설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 붓두껍 전설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 온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고픈 많은 사람들의 의도가 낳은 전설인 셈이다. 더구나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가 정말로 국외 반출 금지 품목이었는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문익점 강남 귀양설.

문익점은 ‘중국 강남 지방에서 3년 간 귀양살이’한 적이 있을까? 적어도 공식 역사 기록에 따른다면 그런 일은 없었다. 그가 원나라에 가 있을 때, 원나라는 반원(反元) 정책을 펴던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특히 고려 출신 기황후는 기 씨 세력을 몰아낸 공민왕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덕흥군은 원나라가 내어 준 군사 1만과 함께 고려로 향했다. 원나라에 머물던 고려인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모시라는 압력을 받았다. 문익점을 비롯한 다수가 압력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덕흥군의 군사는 고려군에 패했고, 원나라는 덕흥군을 옹립하려던 뜻을 접어야 했다. 문익점이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덕흥군 관련 행적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낙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큰 처벌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원나라에 머물던 상황에서 원나라의 압력을 이기기 어려웠다는 일종의 정상참작이 이뤄진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는 이후 1375년(우왕 1) 다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었다.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고려의 사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에 부(附)하였다가 덕흥군이 패하므로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 와서 그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거의 다 말라죽고 한 포기만 살아 3년 만에 크게 번식되었다. 씨 뽑는 기구와 실 빼는 기구도 모두 천익이 창제하였다. ([고려사] 열전)

 

문익점 강남 귀양설의 초기 근거는 태종 1년(1401) 권근이 문익점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자 상소하면서 ‘문익점이 강남에 들어가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가지고 와서’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이후 여러 글에서 ‘강남에 귀양 갔다’고 언급되면서 최종적으로는 19세기 남평 문씨 문중에서 펴낸 [삼우당실기]에 집약되어, ‘강남에 유배되어 3년 뒤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어 가지고 귀국했다’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가 완성됐다. 덕흥군 편에 섰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달리 덕흥군 옹립에 반대하다가 귀양 간 것으로 바뀐 것이다.

 

삼국 시대에도 면직물은 생산되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면직물이 전혀 없었을까?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서 [한원(翰苑)]에는 고구려가 백첩포(白疊布)라는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 경문왕 조에는 869년 7월에 다른 여러 물품과 함께 백첩포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0년 7월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1999년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백제시대 직물 1점을 분석한 결과, 우리 땅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역사기록과 유물로 볼 때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에도 한반도에서 면직물이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가 인도종이며 그전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면직물의 원료는 아프리카종, 즉 초면(草綿)이었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목화와는 다른 원료였다는 것. 또한 삼국 시대 목화는 중앙아시아 품종이어서 우리 토양과 기후와 잘 맞지 않아 대량 재배되기는 힘들었고, 면직물도 대외 교류 등에서 소량이 사용되는 매우 귀한 직물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결국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게 적응되어 본격적으로 목화 대량 재배와 면직물 생산이 이뤄진 것은 문익점 이후의 일이라는 뜻이 된다. 문익점이 들여 온 목화씨가 방적하기 편한 종류의 것으로 대량 생산에 적합했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삼국 시대 면직물 생산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한반도 목화 재배의 역사와 면직물의 역사에서 문익점이 차지하는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도입에서 정착과 보급으로 나아간 큰 공로.

문익점 이전에도 누군가 목화씨를 들여와 심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더러는 목화 재배에 성공한 사례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도입은 했을지언정 그것을 이 땅에 정착시키고 재배법과 면직물 생산기술을 널리 보급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문익점과 정천익은 살아남은 한 그루를 다시 3년 간 가꾸어 대량 재배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원나라 승려 홍원의 도움을 받아가며 솜에서 씨앗을 빼는 씨아와 실을 잣는 물레를 만들어 보급했다. 문익점의 큰 공로는 목화씨를 들여온 사실 자체보다 바로 이러한 정착과 보급에 있었다.

 

백성들의 신산한 삶을 나타내는 ‘헐벗고 굶주린다’는 표현이 있다. 이 땅에서 목면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사람들 대부분은 베옷으로 사시사철을 지내야 했다.

 

여름에야 통풍이 잘 되어 시원하다고 하지만, 한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지내야 하는 고통은 ‘헐벗은 고통’ 바로 그것이었다. 베옷 안쪽에 풀잎이나 짐승의 털을 넣기도 했지만, 삼베옷을 가지고서는 보온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문익점이 널리 존경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헐벗었던’ 백성들의 의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데에 있다.

 

더구나 문익점에서 시작된 목면 생산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들어야 하고 마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베와 비교하면, 씨아와 물레를 사용하는 목면은 생산성이 매우 높고 여성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목화 재배와 목면 생산을 특히 적극 장려했던 세종이 문익점을 ‘부민후(富民侯)’, 즉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로 추증토록 한 것은 농가 경제를 두텁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결과이다. 문익점은 민생 향상과 국부 증진에 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킨 인물로 존경 받았다.

 

동북아시아 무역 질서의 한 축이 되었던 면포.

세종 때인 15세기 중반부터 면포는 국가 경제와 세금 체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시기부터 면포는 마포를 대체하여 화폐와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경국대전]에서도 길이 약 16미터, 폭 약 33센티미터를 한 필로 하고, 실 여든 가닥을 1승(升)으로 하여 5승포를 정식 규격 품질의 면포, 즉 정포(正布)로 정했다. 조선 전기 면포의 가치는 한 필에 쌀 두 말, 후기에는 한 필에 쌀 한 말 정도였고, 5승포는 일종의 고가 화폐, 그보다 구조가 성긴 3승포가 저가 화폐 구실을 했다.

 

면포는 조선의 국제 무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품목이었다. 예컨대 여진의 상등 말 한 필에 면포 45필, 중등 말에는 면포 40필, 하등 말에는 면포 20필로 거래했다. 또한 일본의 은, 동, 소목(蘇木) 등과 면포를 거래했는데, 성종 때 일본에 대한 면포 수출량은 약 50만 필에 달했다. 일본에 목면을 수출하여 은을 입수한 뒤, 은을 지불하고 중국에서 비단, 도자기, 서책, 약재 등을 수입하기도 했다. 면포는 동북아시아 무역 질서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어 몰래 들여왔다거나 강남에 귀양 갔다거나 하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문익점의 노력이 후대에 끼친 막대한 영향에 비교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초기 재배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노력한 끝에 재배에 성공하고 면직물 생산 기술까지 보급한 집념과 성의. 문익점은 그러한 선구자적 노력과 집념과 성의 측면에서 위인의 반열에 들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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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화재2013. 12. 2. 15:56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말, 최영(崔瑩, 1316~1388)은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자 재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고집했고 원∙명 교체기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키워낸 새로운 무장세력 이성계와 불화한 탓에 결국 그토록 지키고자 하였던 고려 왕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다.

 

고려 말 환란을 해결하며, 동분서주한 해결사.

최영은 고려 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영의 가문은 왕건의 고려 개창을 도운 철원 최씨(동주 최씨라고도 함) 가문으로 그의 5대조 최유청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냄으로써 고려의 유수한 문벌 가문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최영은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그가 무인으로서 첫발을 디딘 것은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 당시 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힘을 보태면서 호군(護軍)으로 출세하였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공민왕의 시종했던 공을 들어,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된 이후 그 방자함이 도를 넘어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자였다. 안팎으로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는 고려왕실의 해결사로서의 최영의 일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최영은 원나라의 원군 요청에 따라 중국으로 출정하여 당시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는 원∙명 교체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고려의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오기 위한 공민왕의 뜻이기도 하였다. 이후 공민왕의 뜻을 받든 최영은 밀직부사 유인우의 휘하에서 원나라에 맞서 싸워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땅을 되찾는데 일조하였다. 이 쌍성총관부의 땅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최영은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인이었지만 쌍성총관부 지역의 원나라 관리로 있다가 공민왕 시기 고려조정과 그 뜻을 같이하여 쌍성총관부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북으로는 홍건적을,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며 고려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낸 대표적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일본의 이키∙쓰시마∙기타큐슈∙세토나이카이 등을 근거지로 삼았던 왜구는 14세기에 이르러 근 40년 동안 한반도의 해안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최영은 삼남지역 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하여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는 별명을 얻으며 왜구들의 공포 대상이 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왜구에 시달렸던 삼남 지역 백성의 신망도 얻었다. 또 북쪽에서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은 중국 본토에서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의 지배를 타도하자고 일어난 농민 반란세력으로 이즈음 원나라 군대에 밀려 고려에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홍건적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한때는 홍건적이었다. 최영은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와 서경까지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쳤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국외 세력의 외침에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은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에도 고려왕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공민왕을 시역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하고, 공민왕의 반항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낸 군사 1만 명을 의주에서 섬멸하였다. 한때 최영은 신돈의 모략으로 6년간 유배 길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신돈 실각 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앙 무대로 진출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왜구들을 격파하여 왕실과 백성들로 신망을 얻었다. 이렇듯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환란에 최영은 동분서주하며 고려왕실과 국가의 보호자로서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원,명교체기의 혼란을 노린 야심찬 요동정벌.

고려의 명실상부한 명장으로 우뚝 선 최영은 내정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히 해나갔다. 특히 공민왕이 죽고 이인임 등이 축출되고 나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위태로운 운명의 우왕을 보호한 것이 바로 최영이었다. 최영은 그의 서녀를 우왕의 비로 들여보내고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그 여파가 고려에까지 미쳤다. 1368년 주원장이 화남을 통일하고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국한 한족의 나라 명은 이미 그 세가 다한 원나라를 압박하면서 북벌을 개시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몽골인들은 중국 본토 지배를 포기하고 북쪽 몽골 지역으로 물러났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로, 명나라는 이 지역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의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나선 것이다.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할 때 전투를 치른 경험도 있었던 최영은 명나라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발했다. 최영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나라가 내정의 불안정으로 아직은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기회에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최영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 잇단 외침을 잘 막아내 민심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최영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시기가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운 여름인 점과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하여 남쪽에 왜구가 들끓을 것에 대한 우려,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최영의 요동 정벌론에 맞섰다.

 

고려왕실의 운명을 바꾼 위화도 회군 그리고 최영의 실각.

최영의 보호를 받고 있던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 남고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군대를 내주어 요동정벌 길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영이 이성계에게 군대를 내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전을 내준 것과 진배없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장마를 만나 섬에 갇히게 되고 군대를 이상 전진시킬 수 없게 되자 여러 차례 회군의사를 고려조정에 아뢰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결국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것이 바로 고려와 최영의 운명을 완전히 침몰시킨 위화도 회군 사건이다.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린 이성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결국 개경으로 들어와 무력시위 후 정권을 탈취하였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급히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이성계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을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내어준 상황에서 최영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최영은 합포로 옮겨졌다가 결국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 참형 되었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였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풀이 나지 않는 무덤의 주인공.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는 최영이 남긴 말로 유명하다. 원래 이 말은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최영이 16세 경에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한다. 원래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았던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이 글귀를 써서 곁에 두고 항상 되새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위관직에 있을 때도 별다른 청탁이나 뇌물 사건에 휩쓸리지 않았다. 외적을 막고 고려왕실을 보호하며 청렴하기까지 했던 최영은 그래서 온 나라의 백성으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았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고 나서 존경하는 선배 무장이었고 싸움터에서는 전우이며 그를 장군의 자리로 이끌어준 것과 다름없는 최영을 결국 참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국민적 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불러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았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장군의 무덤에는 내내 풀이 자라지 않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해 현재는 무성하다.

 

민간의 무속 신앙으로 자리 잡은 최영장군의 인기.

고려 말기 명장인 최영의 전 국가적 인기는 고려가 멸망한 후 민간의 무속 신앙으로 변모하였다. 무속에서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태평의 신으로, 무에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 최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민초는 최영을 장군신으로 다시 부활시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영장군’ 신은 조선시대부터 한반도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숭배받는 신이 되었고, 지금도 한반도 최고의 장군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매년 음력 5월 단오날에 부산 자성대에 있는 사당에서 '최영장군제'가 열리고 있고 전국 곳곳에 최영장군을 모시는 굿당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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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화재2013. 12. 2. 15:52

 

위인전을 읽었다면 유치원생도 들어봤을 이름이 귀주대첩의 신화를 만든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수였고, 죽어서는 설화가 되었다.

강감찬이 막아낸 외적은 거란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을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고, 1018년의 세 번째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인물이 강감찬이다. 이후 현종의 친조를 들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차 침입한 거란의 소배압을 귀주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침으로써 명장과 명신으로 추앙받는 삶을 살았다.

 

강감찬이 다른 역사 인물과 다른 점은 역사기록은 물론이고 문헌 혹은 구비설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강감찬은 사후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화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 인물이 설화 속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공적이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곡성의 빛을 타고 태어난 고려의 명재상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부친인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영웅이 탄생하는데 신화가 없을 수 없다.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꽤 유명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세상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다음과 같은 소개 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어떤 사신(使臣)이 한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 오다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고 전하며, 그가 재상이 된 후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고려사]에 전하는 강감찬의 탄생일화는 막 태어난 아이를 사신이 데리고 가서 키웠다는 앞뒤 안 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전설의 흔적을 오늘날 낙성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관상이 실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강감찬의 관상만은 귀인상이었다.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송나라 사신이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 전한다.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

 

북두칠성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이라 한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계속되는 거란의 친입으로 궁지에 몰린 고려,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다.

1010년(현종 1년)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였지만,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이 철수하였다. 이후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를 거절하였고, 결국 고려와 송, 거란 3국의 관계는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10여 년 전과 같이 다시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1014년(현종 5년) 9월 소적렬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는 것을 신호로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송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데다 그 무렵 거란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송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 고려는 1016년(현종 7년) 또다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의 공격은 소합탁이 패배한 뒤로 약 1년 동안 잠잠하였다. 잠시 소강기를 갖게 되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소배압은 앞서 1차 침입 때에 왔던 소손녕의 형으로 2차 침입 때에는 거란 성종을 따라 개경까지 왔던 인물이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상원수가 바로 평장사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이 처음 병력을 이끌고 진을 친 곳은 영주(안주)였다. 그러나 곧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2천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내를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후에도 부원수 강민첨과 시랑 조원의 공격으로 꽤 많은 부하가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귀주,바람의 방향이 바뀌다.

결국 이듬해 정월, 그는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개경을 코앞에 둔 소배압은 기습부대들의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 철군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회군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이들을 급습했다. 퇴각하는 소배압이 외나무다리에서 강감찬과 만난 곳이 바로 ‘귀주’였다.

 

처음 양 진영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채 좀처럼 승부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경에 내려갔던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밖에 안 되었으며, 게다가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소배압에게는 그야말로 한 맺힌 압록강이었다.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진노하여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하였다.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되어 귀양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하다.

 

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거란역사에서는 가장 비참한 패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패장 소배압이 자신의 낯가죽을 걱정하는 사이, 승장 강감찬은 3군과 포로를 이끌고 당당히 개선했다. 강감찬이 개경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친히 영파역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화 8가지를 강감찬에게 꽂아 주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영파역은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이곳의 역리는 지방관리와 같은 관대(冠帶)를 받았다.

 

신화가 된 장군.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다 준 강감찬은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낙향한 뒤에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 등 저술에도 힘써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1032년(덕종 원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강감찬이 죽자 덕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강감찬은 수많은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일궈낸 귀주대첩이야말로 신화라 불릴 만 한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강감찬과 관련한 설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호환(虎患)을 없앤 이야기다.

 

고려의 강감찬이 현종 때 판관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아 백성의 걱정이 많았다. 강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 북동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그의 말대로 하니 과연 중이 있었다. 아전을 따라온 중을 보고 강감찬이 꾸짖으며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어 강감찬이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크게 울부짖고는 한 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고 사라졌는데, 이후로 한양에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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