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김상헌은 한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데 그분에 대해 알아보자.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1652〔효종 3〕)은 한국사에서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이다. 그 상징의 핵심은 ‘숭명배청(崇明排淸)’일 것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가 조선시대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82년에 걸친 긴 생애동안 김상헌은 왜란과 호란을 모두 겪었다. 전쟁으로 목숨까지 잃은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가 특별히 혹독한 고통을 겪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노령에 청의 심양(瀋陽)까지 압송된 것을 포함한 여러 사실은 그가 적지 않은 육체적ㆍ정신적 역경을 거쳤음을 수긍하게 만든다.
그 시대에 그의 판단과 처신이 옳았는가 하는 측면은, 거의 모든 사안이 그렇듯이,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명료한 이념을 철저히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 이념과 실천은, 그뒤 ‘북학’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정계와 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리고 뒤에서 보듯이 조선후기의 대표적 세도가문인 안동(장동) 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서 출발했다.
김상헌은 본관이 안동으로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 등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570년(선조 3) 6월 3일에 서울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연보]에는 어머니가 임신한 지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김극효(金克孝, 1542〜1618. 자는 희민〔希閔〕, 호는 사미당〔四味堂〕)는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양구(楊口)ㆍ동복현감(同福縣監)ㆍ금산군수(錦山郡守)ㆍ돈녕부 도정ㆍ동지돈녕부사 등 주로 외직이나 중앙의 한직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외가의 성세는 대단했다. 우선 외조 정유길(鄭惟吉, 1515∼1588. 본관 동래)은 좌의정을 역임한 당시의 대표적인 대신이었다. 정유길의 조부는 중종 중반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이고, 증조는 성종 때 이조ㆍ공조ㆍ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좌리(佐理)공신에 책봉된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었다.
후손들도 매우 뛰어났는데,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鄭昌衍, 1552∼1636)은 좌의정, 손자 정광성(鄭廣成, 1576∼1654)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에도 이 지파에서는 정태화(鄭太和, 1602∼1673. 영의정) ㆍ정치화(鄭致和, 1609∼1677. 좌의정)ㆍ정만화(鄭萬和, 1614∼1669. 이조참판)ㆍ정재숭(鄭載崇, 1632∼1692. 우의정)ㆍ정석삼(鄭錫三, 1684∼1729. 호조참판)ㆍ정홍순(鄭弘淳, 1720∼1784. 우의정) 등 조선 후기의 주요한 대신을 여럿 배출했다.
조선 중기부터 종통(宗統: 종가 맏아들의 혈통)이 중시되면서 양자 입적이 활발해지는데, 김상헌은 자신이 입적되고 후손도 입적시키는 이례적인 경험을 모두 겪었다. 그는 2세 때 큰아버지 김대효(金大孝, 1531〜1572)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 별세하자 그에게 입적되었다(1572년〔선조 2〕). 9세부터 친부에게서 글을 배웠고(1578년〔선조 11〕), 12세 때는 천연두에 걸려 아주 위독했다가 이듬해에야 간신히 나았다(1582년〔선조 15〕). 그 뒤 김상헌은 15세 때 성주(星州) 이씨(선전관 이의로〔李義老〕의 딸)과 혼인했고(1585년〔선조 18〕), 5년 뒤인 20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1590년〔선조 23〕).
관직생활의 시작
그가 겪은 첫 번째 큰 전란인 임진왜란은 아직 출사하기 전인 22세 때 발발했다.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했다가 겨울에 강화를 거쳐 충청남도 서산(瑞山)으로 갔다. 이때 아들 종경(宗慶. 1589년〔선조 22〕 출생)이 3세로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전란의 와중인 1596년(선조 29) 가을에 김상헌은 과거에 급제해(19명 중 13등) 승문원 부정자로 출사했다. 길고 화려했지만, 당시의 주요한 인물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험난한 관직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선조가 붕어하는 1608년까지 10여 년 동안 김상헌은 이런저런 중하급 관직을 거쳤다. 중앙에서는 저작ㆍ박사ㆍ예조ㆍ이조좌랑ㆍ부수찬ㆍ지제교ㆍ정언ㆍ예조정랑 같은 청요직에 근무했고, 외직으로는 제주 안무어사(按撫御史)ㆍ함경도 고산도(高山道) 찰방(察訪)ㆍ경성판관(鏡城判官)ㆍ개성부 경력 등을 수행했다.
이 기간에 부기할 사항은 두 가지인데, 우선 1602년(선조 35)에 고산도 찰방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먼 외직에 발령된 것은 당시 실세였던 유영경(柳永慶, 1550∼1608)과의 알력 때문이었는데, 앞서 그가 대사헌에 임명되는 데 김상헌이 반대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다음으로 둘째 형 김상관(金尙寬)의 아들 김광찬(金光燦, 1597∼1668)을 후사로 들인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1607년〔선조 40〕). 뒤에서 쓰겠지만, 바로 이 김광찬의 후손에서 조선 후기의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계보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김상헌은 친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아픔은 후대의 커다란 영광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침체의 세월
김상헌에게 광해군의 치세는 대체로 침체와 불행의 세월이었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의정부 사인ㆍ교리ㆍ사간ㆍ응교ㆍ직제학ㆍ동부승지 같은 비중있는 관직을 지냈지만, 빛보다는 그늘이 더 짙었다.
첫 시련은 1611년(광해군 3)에 파직된 것이었다. 원인은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라고 불리는 우찬성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상소였다. 그 논지의 당부(當否: 옳고 그름)와 상관없이, 그 글은 조선시대에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문건의 하나일 것이다. 제목 그대로 그 글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 이황을 변론해 배척하고, 자신의 스승인 조식(曺植)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상헌은 동료들과 함께 정인홍을 강력히 비판했다.
곧 복직되기는 했지만 김상헌은 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에도 아들 김광찬이 역모로 몰려 옥사한 김제남(金悌男. 선조의 국구이자 영창대군의 외조)의 손녀사위라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
그 뒤에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었다. 1618년(광해군 10) 2월 생부 김극효가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에는 생모 정씨가(1621년〔광해군 13〕), 그 이듬해에는 모친 이씨가 별세했다(1622년). 그는 본관인 안동과 거주지인 경기도 양주(楊州)의 석실(石室)을 오가며 삼년상을 치렀다.
1623년 3월에 광해군과 북인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인조와 서인이 집권하면서 김상헌은 서인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차례의 호란이 상징하듯이, 인조의 치세에 국가와 국왕ㆍ신민은 모두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많은 나이인 50세를 넘긴 김상헌은 타협하지 않는 정신과 행동으로 그 난관에 맞섰다.
호란과 숭명배청의 실천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김상헌은 석실의 움막에서 복상하고 있었다. 53세의 나이였다. 이듬해 4월에 탈상한 그는 1625년(인조 3)까지 이조ㆍ형조참의ㆍ대사간ㆍ우부승지ㆍ도승지ㆍ대사헌ㆍ부제학 같은 주요한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때 대륙에서는 명의 몰락과 청의 흥기라는 중국사의 마지막 왕조 교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1626년 8월에 김상헌은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파견되었다. 주요한 임무는 당시 가도(椵島)에 주둔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명나라의 무장 모문룡(毛文龍)과 관련된 사정을 명 조정에 해명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호란은 그가 북경에 도착한 직후에 발발했다. 1627년(인조 5) 3월에 북경에서 그 소식을 들은 김상헌은 명에 원병을 주청했지만, 정묘호란은 개전 두 달 만에 종결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김상헌은 형조ㆍ예조ㆍ공조판서ㆍ우참찬ㆍ대사헌 등 중직에 두루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사양하고 석실로 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석실에 있었다. 66세의 노대신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함)한 조정을 뒤따라 들어갔고, 그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척화와 항전을 주장했다.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먼저 싸워 본 뒤에 화친을 해야 합니다. 만약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김상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데 반대했고,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지은 항복 국서를 찢어버렸다. 그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인조의 물음에 “천도(天道)를 믿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인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청음집] <연보>).
1637년 1월에 김상헌은 죽음을 결행하기도 했다. 엿새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풀어주어 살아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 거의 죽을 뻔한 것이다.
그달 그믐, 인조는 성을 나왔고 항복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왕조 역사에서 처음 겪는 가장 큰 굴욕이었다. 척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67세의 노대신의 마음은 그지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시련과 별세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상헌은 여러 고초를 겪었다. 물론 반청(反淸)의 댓가였다. 1637년 2월 7일에 그는 안동으로 낙향했다. 형 김상용(金尙容)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뒤였다.
3년 뒤인 1640년(인조 18) 11월에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는 김상헌이라는 인물이 관작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조정에서는 그를 심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그가 도성을 지날 때 인조는 어찰(御札: 임금의 편지)을 내려 위로했다.
김상헌은 “소신이 형편없이 못난 탓에 끝내 성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모자랍니다”라고 화답했다. 그를 만나고 온 신하들은 행동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김상헌은 1641년(인조 19) 심양의 북관(北館)에 구류되었다. 그해 11월 부인 이씨가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도 병이 심해져 12월에 의주(義州)로 보내졌다가 1643년 1월에 다시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때 대표적 주화론자인 최명길도 심양에 잡혀와 있었다. 16세 차이로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이 포로의 신세로 주고받은 시는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최명길은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라고 읊었고, 김상헌은 그 운에 맞춰 이렇게 화답했다.
김상헌을 비롯한 조선 지식인 대부분의 정신적 지주였던 명은 1644년(인조 22)에 멸망했다. 그때 김상헌은 74세였다.
이듬해 2월에 김상헌은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를 모시고 귀국했다. 그는 바로 석실로 돌아갔다. 소현세자는 두 달 뒤 급서했다.
이때부터 별세할 때까지 김상헌은 주로 석실에 머물렀다. 1646년(인조 24) 3월에는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무려 32번이나 사직해 한직인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이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함께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중요한 말을 선정했다.
1649년 5월에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한번 좌의정으로 불렀으나 역시 고사했다. 그 대신 10월에 임금을 알현하면서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 대사헌 김집(金集)을 중용할 것을 당부했다.
‘숭명배청’의 절개를 상징하는 노대신의 일생은 3년 뒤인 1652년(효종 3) 6월 25일, 82세로 마감되었다. 그는 석실의 선영에 모셔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양주에 세워진 석실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과 남한산성 현절사(顯節祠)에 모셔졌으며, 효종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