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2013. 11. 30. 18:27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李馨益)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했다. <인조 23년 4월 23일, [인조실록] 권46>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가장 큰 의혹은 바로 그의 죽음에 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년 강석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병자호란 후 정축맹약에 따라 1637년(인조 15)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였지만,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하였다. 오한이 나 병을 치료 받은 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학질은 대개 모기에 의해 발병이 되는 것으로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고 땀과 갈증이 심해지며 주기적인 발작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병이다. 온대지역에도 말라리아가 유행하였기에 오래 전부터 한방에서도 학질에 대한 치료로 침구와 약 처방이 있어왔다. 그런데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는 열대형과 달리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로 진단을 받은 이후 의원들은 그에 적절한 처방을 진행하고 있었다. 침과 함께 소시호탕과 같은 탕약이 처방되었다. 그러나 세자의 증상은 급격히 나빠져 갔다.

 

소현세자가 사망할 즈음, [조선왕조실록]에는 심상치 않은 기록이 있다. 소현세자가 학질로 진단받던 4월 23일 다음날에 화성이 적시성(積屍星)을 범하였다는 기록과 경상도 칠곡현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실록에 지진에 대한 내용은 수천 건에 이르고 있으므로 특별히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흔한 것이 아니다. 적시성은 죽음을 상징하는 재난의 별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조선왕조 전 시기동안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24회 정도에 불과하다. 그 만큼 드문 천문현상이며,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인조 대에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총 4회이다. 적지 않은 기록이다. 총 4회 중에 주목되는 것은 병자호란 발발 2년 전인 1634년과 소현세자가 사망한 1645년이다.

 

4월 24일 세자가 침을 맞았다
4월 24일 화성이 적시성을 범하였다.

 

적시성을 범하는 오성(五星)은 목성과 화성이다. 이 가운데서도 화성은 목성 보다 더 불길한 것으로 해석된 듯하다. 적시성 관측 기사는 마치 조만간 있을 세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튿날인 4월 25일 세자는 다시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그 다음날 26일 오시(午時)에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사망했다. 급작스런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종실이었던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시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했다. 이세완이 본 세자의 모습은 학질이 아닌 약물 중독으로 죽은 모습이었다. 세자의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얼굴 반을 덮어 놓은 상태였다. 이세완은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얼굴빛이 검어도 주위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소현세자가 병에 걸렸을 때 담당 의원은 이형익이라는 자였다. 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의관으로 특별 채용된 자로 소현세자 내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애첩 조소용의 친정에 출입하던 자였다. 인조실록의 편찬자가 소현세자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소용이 세자 내외를 평소 인조에게 무함했던 일을 함께 거론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돌연사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했다. 대신들이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그 예법마저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부친인 인조의 미움을 받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것은 1637년 4월이었다.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웠다. 심양에서 이들은 새로 건축한 심양관소, 즉 심관(審館)에서 생활했다. 심관은 양국간의 각종 연락사무나 세폐와 공물의 조정,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 등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 같은 기능을 했다. 심양 생활은 단조로운 고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무척 다양하고 바빴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그 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맺었다. 또 뇌물외교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과의 무역이나 둔전(屯田)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부인인 세자빈 강씨는 영리하고 사업 수완이 좋아 외교적인 문제는 소현세자가, 경제적인 문제는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청은 중국 통일의 야망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세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조선을 담당하고 있던 용골대는 세자와 마음을 터 놓는 사이처럼 지냈다. 처음 심관 생활은 엄중한 감시와 제한 속에 보내야 했지만, 점차 청은 세자에게 각별하게 대했다. 몽고 각지의 행사에도 초대했고 정기적인 연회에도 세자 부부를 참석시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지원병과 물자요구가 있었고 이를 조선에 보고해야 하는 세자의 입장은 항상 바늘방석이었다. 1644년 마침내 청은 북경을 차지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살했다. 더 이상 청은 조선의 왕세자를 인질로 묶어둘 이유가 없어졌고,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중원을 차지한 청의 힘을 지켜 본 소현세자는 삼전도의 굴욕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인조와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반기지 않았다.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귀국 전부터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심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냉담한 환대 속에 귀국했고, 그가 가져온 청나라 물건은 인조의 불쾌감을 가중시켰다. 인조에게 비친 소현세자 내외는 청에서 고초를 겪다 온 것이 아닌 호강을 하다 온 것처럼 보였다. 결국 소현세자는 가져온 채단(彩段) 4백 필과 황금(黃金) 19냥을 호조로 돌려 보냈다.

 

선교사 아담 샬과의 만남.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직전 70일 정도를 북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 친교를 맺으며 그로부터 학술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근 8년이나 외롭게 외국 생활을 했던 소현세자로서는 벽안의 외국인이 흥미롭기도 하고 그가 가진 식견이 놀랍기도 했다.

 

아담 샬은 역대 중국에서 외국인으로는 가장 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중국 포교 1세대인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1622년 중국으로 건너가 가톨릭 포교활동에 힘쓰며 천문·역법에도 밝아 월식(月蝕)을 예측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었다. 명나라 말에 북방의 청에 대항하기 위해 대포를 주조하기도 하였으나, 명이 망하고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 세조의 신임을 받아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담 샬의 지위로 인해 소현세자는 천주당과 문연각에서 그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아담 샬도 소현세자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겼다. 세자가 희망하는 대로 서양의 천문학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아담 샬로 받은 선물은 천주상·지구의·천문서 등이었다. 소현세자는 천주상을 벽에 걸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소현세자는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세자는 북경의 천주당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에서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강빈과 원손의 죽음.

왕세자로서 국가 경영을 고민하고 탁월한 외교 감각을 지녔던 소현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까. 소현세자의 죽음은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점이 많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그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에게는 불행을 의미했다. 왕위계승자가 제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그 끝은 죽음이었다. 인조 입장에서 강빈과 원손의 존재는 골칫거리였다. 반정을 주도하여 왕위에 오른 인조는 정통성 확보에 예민했고, 왕좌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화근을 미리 자르고자 했다. 그 첫 번째 칼끝은 강빈의 형제들에게 향했다. 인조는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 것에 강씨들이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라 하며, 이들을 귀양 보내려 했다. 드러난 죄가 없으므로 귀양 보낼 수는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강빈의 형제 4명을 귀양 보냈다.

 

결국 죽음의 그림자는 강빈에게도 닥쳤다. 1646년 1월 3일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 안에 독약이 들어 있었다. 인조는 강빈을 주모자로 지목했다. 인조는 강빈의 나인 5명과 음식을 만든 나인 3명을 잡아다가 국문했다. 전복구이 사건은 강빈을 죽이려는 모함에 불과했다. 이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계속해서 강빈이 독을 넣었다고 고집을 피웠다. 한달 뒤, 인조는 김류·이경석·최명길·김육·김자점 등을 불러 “강빈이 평소 무례한 여자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며 처벌할 것이라 했다. 대신들은 지나친 처사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인조는 폐출되어 사사된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떠올렸다.

 

김자점은 인조의 독단적인 주장에 손을 들어 줬다. 그는 일찍이 후계자 논의에서 원손 대신 봉림대군을 내세우려는 인조의 주장에 편을 든 전력이 있었다. 최명길과 이경석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강빈의 죄가 비록 크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조는 마음먹은 것을 실천에 옮겼다. 강빈의 형제 들 중 강문성과 강문명이 누이가 한 일을 모를 리가 없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다 곤장에 맞아 죽었다. 강씨 형제가 죽자 그 다음 차례가 강빈임을 세상이 다 짐작했다. 3월 15일, 강빈은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다. 이어서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제주도 유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도 처형되었다.


일찍이 인조는 소현세자를 위하여 신부감을 고르는데 한 처녀가 부덕을 갖춘 것 같아 내심 마음으로 점지해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기와 달리 앉고 서는 것이 예의가 없고 마음대로 크게 웃었으며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인조는 결국 다른 여성을 며느리 감으로 선택했다. 이후 인조는 부덕 높은 부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녀는 세자빈 간택 시에 며느리감으로 점지해 둔 바로 그 처자였다. 이 때 인조는 “내가 그녀의 꾀에 넘어갔도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화려한 세자빈의 자리가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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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2013. 11. 30. 00:01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다.

김홍도는 1745년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이다. 증조할아버지가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림과 아무 연관 없는 집에서 태어난 중인 소년이 당대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뛰어난 문인화가이자 명문사대부인 강세황에게 어떤 연유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홍도는 “젖니를 갈 때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강세황은 마흔 살 무렵으로 벼슬 없이 경기도 안산에 있는 처가에 살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김홍도가 안산 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스무 살 무렵 이미 당대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김홍도는 스무 살 이전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되어 있었던 듯하다. 1765년 영조가 71세가 되어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望八)에 이른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고 이를 위해 병풍을 만들었는데,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한 김홍도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로 임금의 큰 잔치 그림을 홀로 그렸다는 것은 당대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773년 스물아홉의 김홍도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그림 인생에 중요한 인연을 또 한 사람 만난다. 뒷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은 당시 김홍도의 솜씨가 썩 마음에 들었다. 뒷날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이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화사(畵事)에 속한 일은 김홍도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듯이 이후 정조는 김홍도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후원자가 된다. 

 

영조의 초상화를 그린 김홍도는 그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 사포서(司圃署)의 감목관(監牧官)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마침 두 달 뒤 스승 강세황이 사포서의 별제로 발령을 받아 사제지간이 함께 근무했다. 이때의 일에 대해 강세황은 이렇게 회상했다.

 

“일찍이 군과 더불어 사포서의 동료가 되었을 때, 매번 일이 있으면 군이 나의 노쇠함을 딱하게 여겨 바로 힘든 일을 대신했으니, 이는 내가 더욱 잊을 수 없는 바이다.”

 

삼십 대에 김홍도는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는 말이 전할 만큼 그림으로 높은 이름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 가운데서도 풍속화는 인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각 장면의 극적인 구성이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하는 백성들이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거나 집을 짓는 장인들, 밭을 갈고 꼴을 베는 사람, 물을 긷고 빨래하는 사람, 장사하는 상인들의 모습 등 서민들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그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현감의 자리에 오르기도.

김홍도는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았다. 그에 대해 강세황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벼슬살이를 하고 돌아온 40대의 김홍도는 화조화, 기록화 등을 주로 그렸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 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렸고, 그 이듬해 사신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모시며 현륭원을 건설할 때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의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해, 조선 후기 불화의 명작 중 하나를 남기기도 했다. 입체감을 나타내는 음영을 넣어 독특하게 표현한 이 불화들은 기존의 화풍을 뛰어넘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만 3년 뒤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파직됐다. 백성들 중매를 해주던 인간적 관리였으나 행정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현감 자리를 내주고 평민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자유롭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전념해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명작들을 쏟아냈다. 50대에 이른 김홍도의 그림들은 보다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대담한 생략과 거침없는 붓길이 대가다운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시기의 대표작들은 [해산선학도], [마산청앵도], [세마도] 들이다.

 

아름다운 풍채가 신선 같았다.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낭만적인 예술가였지 생활력 있는 가장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김홍도는 매우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증언도 있고,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도 즐겨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 한두 곡을 연주하며 스스로 즐겼고, 즉석에서 한시를 남길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갖고 있었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두 살이던 1806년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현재 300점 정도의 작품이 전한다.

Posted by motion7
조선의 역사2013. 11. 29. 23:57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48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로서, 그리고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사임당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는 인물로 5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외가에서 태어나 결혼 후에도 주로 친정에서 기거.

우리 역사에서 신사임당만큼 존경받은 여성도 드물지 않다. 그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여성 최초로 고액권인 5만원 화폐 도안 인물로까지 이어졌다. 선덕여왕, 유관순 열사 등 몇몇 후보 인물들이 있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신사임당이 최종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녀의 삶은 50년이 채 안 되지만 그녀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은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계속되고 있다.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에서 서울 사람인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 사람인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다섯 딸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은 서쪽으로 대관령이 병풍처럼 처져있고,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예국(濊國)의 수도로 오랜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申命和)는 본관이 평산으로 고려 태조 때의 건국공신인 신숭겸의 18세손이다. 신사임당의 조부이자 신명화의 부친인 신숙권은 영월군수로 재임한 적이 있고, 이때 매죽루(梅竹樓)라는 누각을 창건하기도 했다. 신명화는 서울 출신으로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을 뿐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전한다. 신명화가 44세 되던 1519년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으나, 벼슬을 하지 않았던 덕에 화를 면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생애에서 눈 여겨봐야 할 것이 강릉지역에 터를 둔 외가이다. 어머니 이씨 부인은 본관이 용인이며 강릉 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손녀이다. 이씨 부인은 강릉에서 외조부인 최응현 밑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최치운은 이조참판을 지낸 인물이다. 신사임당과 모친인 이씨 부인이 외가 쪽과 밀접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의 가족문화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는 부계중심의 가족문화가 발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가족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린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중기까지 결혼을 바탕으로 한 가족문화는 여성의 거주지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때문에 신사임당과 그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이 친정 쪽에서 거주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현모양처로서의 삶과,화가로서의 삶.

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사임당 외에도 시임당·임사제라고도 하였다. 사임당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추었다는 태임(太任)을 본받는 뜻이 담겨 있다. 태임은 신사임당의 롤모델(role model)이었다.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종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보면서 모방해 그렸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할머니 최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아버지 신명화 보다는 시와 그림, 글씨 등을 외가를 통해 전수받았다.

 

사임당이 결혼한 것은 1522년인 19세 때로 남편은 덕수 이씨 가문의 이원수이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기록에 따르면 사임당은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근 20년을 강릉에서 주로 살았다고 한다. 아들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어 시집인 서울에 가서 살지 않고 친정인 강릉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결혼 몇 달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 살기도 했다. 때로는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리는 사이에 셋째 아들인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재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간혹 아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부군인 이원수의 나이가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이후 10년을 더 살았다. 부인을 잃은 후 이원수는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했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되었고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조운산이 있다. 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십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 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오나 외조모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조모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율곡전서])

 

천재화가 보다는 율곡의 어머니로 칭송받아.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소세양(蘇世讓)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부덕의 상징으로서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1백 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이다.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인물인 송시열(宋時烈)이 사임당의 그림을 찬탄하면서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는 평가에서 비롯되었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화가 보다는 그를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모성의 신화화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에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신령스런 천지의 기운을 받아 율곡을 잉태한 여성이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해 율곡을 기른 어머니 사임당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임당의 일생을 돌아보면, 현모양처 이전에 화가로서 그리고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전통시대에 남성 지식인들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이었다. 따라서 화가라는 자신의 일생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부각되었다. 이는 사임당을 부덕의 상징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게 한 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시켰고, 다양한 렌즈로 그녀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 신사임당이 어떤 여성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런지, 그녀의 부덕 보다는 화가로서 추구했던 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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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2013. 11. 29. 23:54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매일 강무(講武)할 때에는 나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귀화인 아버지를 둔 동래현의 노비

조선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기억되는 장영실(蔣英實). 역대 과학자 가운데 장영실만큼 이름이 회자되는 인물도 없지 않을까 싶다. 장영실은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였으며,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한국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유명인이었지만, 정작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장영실이 어떻게 출생하여 성장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官奴), 즉 노비였다.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의 부친은 원(元)나라 사람으로 소주(蘇州)·항주(杭州)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한다.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실상 부친이 관노가 아니었음에도 장영실이 관노가 된 것은 모친의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 관기(官妓)들은 신분상 천민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라 관기가 딸을 낳으면 어머니를 따라 관기가 되었고, 아들은 관노가 되었다.

 

신분제도라는 굴레 탓에 천인에 속하는 어머니 신분을 따라야 했지만, 부친이 원나라 출신의 귀화인이었다는 점은 다른 관노와는 다른 점이다. 태조에서 세종대까지 조선 정부는 귀화인들의 정착을 위해 조선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귀화인들과 혼인한 여성들은 대체로 관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족(漢族) 혹은 족장과 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대체로 양인 여성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장영실의 모친은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영실이 태종과 세종대에 살았던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지만, 양반이 아닌 까닭에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애매한 실록 기록과 달리 [아산장씨세보]에는 장영실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라고 되어 있다. 장영실의 부친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줄곧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귀화인인 셈이다. 아산장씨 족보에는 장영실이 관노의 신분으로까지 추락한 것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부친인 장성휘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역적으로 몰려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떤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 현재로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점은 장영실은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 가정 출신이었고, 과학적 재능이 비상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출신은 비천했으나,뛰어난 재주로 승승장구하다.

장영실은 이미 태종 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종사하였다. 제련(製鍊)·축성(築城)·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년)에 윤사웅·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고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장영실이 상의원 별좌 자리에 오르게 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주려 했던 세종은 이 문제를 이조판서였던 허조(許稠)와 병조판서였던 조말생(趙末生)과 의논했다. 이 논의에서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조말생은 “가능하다.”라고 했다. 두 대신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세종은 재차 다른 대신들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했는데, 대신 중에 유정현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라고 하자 곧바로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로 임명했다. 상의원(尙衣院)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지만,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이후에도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의 관직을 내려주려 했는데 이때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황희가 “김인이라는 자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신 적이 있으니, 유독 장영실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저절로 움직이는 물시계,자격루

기계 시계가 없었던 옛날에는 태양광선이 던져주는 해 그림자를 통해 하루의 시간을 알았고, 밤에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재었다. 그러나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그러한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물시계이다. 물을 넣은 항아리 한 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을 다른 항아리에 받아서 그 부피를 재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부피는 일정하게 늘어나는 데 하루에 흘러들어간 물의 깊이를 자로 재서 12등분 하면 한 시간의 길이가 나오게 된다.

 

물시계는 중국에서 기원전 7세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하며 누각(漏刻), 또는 경루(更漏)라고 불렀다. 그러나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항상 사람을 시켜서 시간을 재어야 했다. 이를 태만히 하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안 맞으면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다. 사람이 일일이 손을 대지 않아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물시계를 만들고자 하는 소망은 결국 중국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이 일궈냈다. 1091년경에 소송은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자동 물시계를 발명했다. 그러나 그 장치들이 너무나 복잡하여 소송이 죽은 뒤에는 아무도 만들지 못해 사라졌고, 12~13세기 아라비아 사람들이 쇠로 만든 공이 굴러 떨어지면서 종과 북을 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다.

 

세종은 그러한 자동 물시계를 반드시 만들어 궁궐에 설치하려 했으나, 자신의 구상을 실현해줄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재주를 높이 사고 면천(免賤)에, 관직까지 내려준 국왕 세종을 위해 장영실은 혼신을 다하고자 했다. 이후 장영실은 당시 세종과 정인지, 정초 등이 조사하고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문헌에 전하는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 물시계를 비교하면서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다.

 

자격루의 제작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장영실은 또 하나의 특징적인 자동 물시계 제작에 착수했다.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를 결합한 천문기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자격루와 혼천의,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절기에 따른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절기에 농촌에서 해야 할 일을 백성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천지인(天地人)이 하나로 연결되는 이른바 세종이 꿈꿨던 왕도정치(王道政治)가 이뤄지는 것이었다. 자격루가 완성된 지 4년 후, 1438년(세종 20년)에 장영실은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淚)를 완성하였고, 세종은 경복궁 침전 곁에 흠경각(欽敬閣)에 지어 그 안에 설치하도록 했다.]

 

최고의 과학자,불경죄를 짓자.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 거의 20년간에 걸친 그의 극적인 공적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다. 출신 배경도 의문이지만, 1442년에 대호군 자리에서 파면된 이후로 그의 만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442년(세종 24년)에 장영실은 임금이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장영실의 임무는 제작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다.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곤장까지 맞아야 한다고 했다.

 

사헌부의 탄핵이 올라오자 세종은 망설이다가 형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에 대해 배려해 준 것이라고는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 준 것뿐이었다. 과거 그의 실수에도 과감히 눈 감아준 전력과는 차이가 있다. 그 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간 세종의 남다른 관심과 장영실의 재주 등을 고려해볼 때 장영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이에 대해 간의대 사업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려 했다는 주장과 천문의기 프로젝트가 끝나버려 장영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주장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빙성 있는 주장들은 아니다.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15세기 최고의 공학자

동래현 관노로 알려진 그가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15세기 최고의 공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미스테리한 그의 일생에서의 실마리는 건국대 남문현 교수에 의해 일부 풀렸다. 세종 때 훌륭한 천문학자인 김담(金淡)이 장영실의 매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동래현 관노였지만, 천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식견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집안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노비 출신이 종3품 벼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문신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일개 기술자가 그 높은 벼슬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간 장영실이 세운 업적은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하여, 대간의·소간의·규표·앙부일구·일성정시의·천평일구·정남일구·현주일구·갑인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그가 더 이상 재주를 펴지 못하고 공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비단 불경죄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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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2013. 11. 27. 19:44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은 새 왕조 개창기에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등에 의해서 견제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재기에 성공, 그러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나 왕위에 오른 뒤 계속된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 보면 그는 500년 조선조 국가 운영의 밑그림을 완성한 군왕이었다.

 

고려의 마지막 기운이 느껴지던 어느 날 이방원과 정몽주가 술상을 앞에 놓고 자리하였다.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던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이방원은 먼저 시 한 수를 읊었다. 우리네 세상살이 중간 중간에 부딪치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잠깐 짬을 내어 감상해보기를 바란다.

 

이른바 ‘하여가(何如歌)’라고 하는 것이다. 정몽주에게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굽힐 것을 전한 것이며, 자신의 뜻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이방원다운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표현이다. 그러자 정몽주가 이방원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받아 들고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이른바 ‘단심가(丹心歌)’라고 하는 것이다. 정몽주의 고려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전부터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방원이었기에 더 이상의 설득은 무의미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통해 선지교(후에 선죽교로 이름이 바뀜)에서 정몽주를 살해하며, 이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국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원, 그는 무장 가문이었던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문과급제자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희망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을 처치하는 거사가 성공한 뒤 남은∙정도전∙조준 등 52인과 이성계의 추대를 협의하고, 공민왕비 안씨를 움직여 수창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새로운 왕조의 시작으로, 이방원은 중요한 고비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새 왕조를 개창한 뒤 아마도 이방원은 부왕의 등극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개인적인 능력이나 중망으로 보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좌절의 아픔을 주었다. 그 첫 좌절이 태조 초에 이루어진 개국공신의 선정과정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개국공신의 선정을 주도한 태조가 공은 인정하되 친자(親子)이기 때문에 공신 선정에서 제외시켰다. 왕자 신분이 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을 것이지만 개국공신의 선정에서 제외된 것은 그것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볼 때 이방원에게는 서운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한 뒤 자신을 비롯해 방의∙방간 두 형을 개국 1등 공신에 추가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이방원은 이후에도 계속 정치에서 소외되며 정도전 등에 의해 견제되었다. 새 왕조가 들어선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392년 8월, 정도전 등이 중심이 되어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당시 배극렴은 “시국이 평온할 때에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먼저 공 있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여, 이방원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이방원은 세자 책봉에서 소외되었다. 더하여 정도전은 중국의 예를 들어 모든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자고 청하기도 하였고, 명나라와 외교적이 마찰이 생기면서 진법 훈련을 실시하면 왕자 및 공신들이 거느리고 사병을 혁파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방원을 비롯한 정적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차원이었다.

 

 

새로운 왕조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다

 

좌절의 순간은 그러나 그리 길지 않았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그야말로 이방원의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시대는 그냥 오지 않는 것, 준비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영광이었다. 이방원과 그 주위 사람들은 좌절의 시기에 앞으로 다가올 재기의 순간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먼저 본인과 부인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사병을 육성하거나 후일을 도모할 준비를 하였고, 여기에 당대 최고의 책사라고 할 수 있는 하륜과의 만남은 이방원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하륜을 통해서 의형제를 맺은 이숙번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의 대세는 이방원에게로 옮겨갔다. 이방원으로서도 바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었다. 정도전 등의 제거가 권력욕으로만 비추어진다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일단 당시 생존하고 있던 형들 가운데 맏형인 영안대군 방과(제일 맏형은 진안대군 방우였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임)에게 왕위를 양보하니, 그가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이었다. 영안대군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적장자가 없었던 점이 이방원에게 후일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유리한 요소였다. 정종 즉위 후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정종이 재위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방원이 차지하게 되니, 그가 바로 태종이었다.

 

태종은 왕세자 시절 사병을 혁파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려고 할 때 반발하던 그가 왕위에 올라서는 이를 혁파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병은 왕권에 위협되는 요소였으므로 태종도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는 혁파해야만 하였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조국가에 맞는 여러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국가의 행정체계를 정비하여 6조 중심의 행정체계를 완성하여 자신의 국정 장악력을 강화하였다. 이 밖에도 오늘날 지방제도의 근간이 되는 8도 체제를 정비하였고, 서얼의 관직 진출 등을 제한하는 서얼차대법을 제정하였으며, 국가 운영의 필수인 인구나 군적 파악을 위해 호적법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제도들은 이후 조선조 운영의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피의 숙청과 수성을 위한 비장한 선택

태종은 국가 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 축출하였다. 가장 먼저 태종의 눈에 가시가 되었던 인물이 이거이였다. 태조 대 무장으로, 그리고 태종과 혼인관계가 있던 이거이였으나 사병혁파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제거되었다. 이거이는 당대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렸던 인물이었다. 이어 태종의 공격 화살은 자신을 그토록 도왔던 원경왕후의 집안으로 겨냥되었다. 외척으로 그리고 태종을 도와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기에 그 권력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나 1406년(태종 6년)과 1409년 두 차례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전위 표명 과정과 1415년을 거치면서 결국 원경왕후의 4형제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야말로 피의 숙청의 연속이었다.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아버지로서 비장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왕위를 물려주기 2개월 전에 있었던 일로,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었다. 당시 의정부를 비롯해 6조 등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양녕대군의 잘못을 논하면서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위해 폐위시키기를 요청하였다. 어렵게 세운 왕조의 수성을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관리들이 세자의 폐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국왕과 교감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왕세자의 폐위에 대해 태종은 천명임을 강조하면서 후계자를 어진 이로 삼는 것은 고금의 대의라고 하며 그 정당성을 말하였다. 그 일이 비록 정당하다고는 하지만, 아비되는 입장에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록에서는 당시 태종의 심정을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냉철한이라도 이 상황에서 심적인 동요가 없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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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2013. 11. 27. 19:38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계속된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급기야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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